요람에서 무덤까지 “책하고 놀자”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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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돌 전 아기에게 책을”…북스타트 운동 출발
5개월 된 딸 가영이의 DPT 3차 접종을 위해 서울 중랑구 보건소를 찾았던 주부 박현수씨(27)는 뜻밖의 책가방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했다. 박씨가 받은 가방 속에는 <왜 우니?> <무얼 할까>라는 영아용 그림책 두 권과 안내 책자, 손수건, 스티커가 들어있었다. 박씨는 그 날 ‘아이들과 함께 책을 가지고 노는 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었다.

“<왜 우니?>라는 그림책을 볼까요. 아기 곰 그림과 함께 ‘아기 곰아, 왜 우니? 아하! 똥을 누었구나’라는 지문이 보이죠? 영아들은 울음이나 표정으로 부모와 의사를 소통하잖아요. 그걸 그린 거죠. 그냥 읽지 말고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세요. 또 아이들이 책을 가지고 놀도록 놔두세요.”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듣느라 열심인 엄마 옆에서 가영이는 책을 집어 입에 넣고 빨기 바쁘다. 자원봉사자는 이를 보며 두 책이 100% 펄프로 제작되었는데, 형광물질을 빼고 코팅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콩기름 잉크로 인쇄해 아기들이 빨더라도 해가 없다고 덧붙였다.

박씨가 그 날 받은 책은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대표 도정일 교수)이 주관하는 북스타트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얼마 전 발족한 북스타트한국위원회(www. bookstartkorea.or.kr)는 올해 말까지 시범 지역으로 선정한 서울 중랑구에서, 생후 5~7개월 된 아이 엄마들이 예방 접종을 위해 보건소를 찾을 때 북 스타트 책가방을 나누어줄 예정이다. 아이 엄마는 현장에서 자원봉사자와 상담하고 회원으로 가입한 뒤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게 된다.

생후 1년 미만인 아이들에게 책은 장난감과 다르지 않다. 심리학자들은 생후 한살 미만 때 애착 형성이 이루어지며, 이는 평생을 간다고 말한다. 책과 친숙해지고 나면 커서도 책을 읽고 즐기는 습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북스타트를 경험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책 읽기에 3배 정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곽금주 교수(서울대·심리학과)팀이 북스타트 적용을 받는 중랑구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동대문구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비교하는 조사를 시작했다. 9월에는 북스타트를 처음으로 개발한 영국 전문가들이 방한해 서울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연다. 북스타트 한국위원회는 올해 말까지 이런 다양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북스타트 프로그램을 확대 실시할지, 다른 지역에서 시범 실시를 다시 해야 할지 결정할 계획이다. 북스타트 운동을 이끌고 있는 도정일 교수는 “자라는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고 책 읽는 경험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개발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간적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북스타트 운동은 종종 조기 교육이나 영재교육의 일종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취재진이 중랑구 보건소를 방문한 4월25일 오전에도 돌이 다 된 아이의 엄마가 멀리서 찾아와 자기 아이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달라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의 회원이면서 이곳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장경화씨(38)는 “한국 부모들의 과잉 교육열 때문에 북스타트 운동이 전혀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북스타트의 취지는 조기 교육이나 영재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도정일 교수는 “조기 교육이 고도의 경쟁 속에 아이들을 집어넣는 것이라면 북스타트는 아이들을 여유 있고 사람답게 키우자는 운동이다”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북스타트 프로그램은 책을 통한 스킨십 운동이다. 책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책의 형태·냄새·촉감 등에 일찍부터 친숙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하여 부모와도 다양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감성이 풍부한 인격체로 자라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소득 수준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은 북스타트 운동이 노리는 또 다른 목표다. 빈곤 계층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박탈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책을 나누어주고 놀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아이들은 큰 기회를 잡는 것일 수 있다. 북스타트 운동은 일종의 문화적 사회 안전망 구실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일정한 시기에 반드시 방문하게 되는 보건소를 사업 장소로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중랑구가 시범 지역으로 선택된 것 또한 이곳이 서민들 주거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북스타트 프로그램은 나아가 디지털 문명에 대한 아날로그식 저항 운동 성격도 띠고 있다. 북스타트한국위원회 서해성 사무처장은 “자본주의 시장 체제는 다분히 인간 파괴적이고 공동체 파괴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장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지만, 파괴적 독소들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독서야말로 인간적인 자기 방어의 기제를 만들어줄 수 있다. 우리는 종이 책만이 줄 수 있는 공공의 기억을 아이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현재 북스타트 시범 실시를 지원하기 위한 북트러스트에는 교보문고·도서출판 문학동네·보림출판사·이랜드 복지재단이 동참하고 있다. 이번에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북스타트 로고가 찍힌 책가방은 이랜드 복지재단이 기증한 것이며, 책과 유아용품은 문학동네가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범 실시를 위한 것일 뿐이며, 북스타트 운동이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재원 마련을 위한 북트러스트 조직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한 해에 55만여명(2001년 기준)이 태어난다. 아이 한 명당 만원씩이 든다고 할 때, 영국처럼 태어나는 아이 대부분이 북스타트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매년 55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북스타트 운동의 기획을 맡고 있는 서해성 북스타트한국위원회 사무처장의 말이다.

“정부가 나서야 할 사업이지만 정부 지원만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만 한국은 시민운동이 성숙한 사회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자발성에 기대가 크다. 기업과 시민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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