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사상
  • 박홍규 (영남대 법대 교수, <오리엔탈리즘> 번역자) ()
  • 승인 200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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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오리엔탈리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사상
20세기 최대의 사상가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죽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를 20세기 최대의 사상가는커녕 ‘103인의 현대 사상’(민음사, 1996년)에도 넣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사이드는 무시되었다. 민족·민중·제3 세계·제국주의·반미 구호가 그렇게도 요란했던 1980∼1990년대에, 20세기를 살았던 어떤 누구보다도 그 이념들을 철저히 사색하고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이드가 그토록 무시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 밖에서는 사이드가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왜 그토록 무시되었을까?

우리 나라에서 그런 구호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회자되었기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가 무시되었을까? 사이드가 마르크스주의자기이기는커녕 마르크스주의조차 동양을 경멸한 서양주의라고 비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아시아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주로 중동에서 벌어진 제국주의를 비판해서였을까?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한 제국주의는 일본과 미국이고, 마르크스가 태어난 유럽은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보는 기막힌 마르크스주의 내지 유럽주의 세계사관 때문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사이드가 1978년에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오리엔탈리즘>이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다리다가, 그 책과는 전혀 무관한 법학도였던 내가 직접 번역에 나섰지만,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그렇게 고생했던 1980년대 말의 일을. 그래서 몇 년 만에 겨우 출판되었으나 여전히 실천과는 동떨어진 채 회자되던 일을.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온 지 10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의 사상이 국내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어느 외국 문학 전공 교수가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중심주의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드가 비판한 서양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19세기 서양은 동양을 침략하면서 동양 취향이나 동양학을 연구한다는 뜻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이 1978년 사이드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곧 서양이 만든 동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예술과 학문으로 제도화해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하는 과정이라고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별 자체가 서양에서 만든 학문과 권력의 기초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 선진과 후진이라는 구별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구별 밑에 학문과 권력의 야합이 있음을 사이드는 비판한다.

사이드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기묘한 생애와 결부된다. 사실 그의 이름부터 그렇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태어났을 때 대영 제국의 왕세자 에드워드(심프슨 부인과 사랑해 왕관을 던진 사람)를 딴 것과 아랍인 성으로 되어 있다. 이 기묘한 합성 이름은 그의 68년 생애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는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언저리에서 둘 사이의 진정한 통합을 모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935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영국이 지배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1947년 열두 살 때 이집트에 망명했다. 또한 사이드는 아랍인이면서 기독교도, 그것도 극소수인 영국 성공회 출신이고, 미국 국적을 가졌으며, 예루살렘과 카이로의 일류 영어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집트도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 식민지 두 군데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사춘기 시절 겪은 현실과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경험은, 뒤에 그로 하여금 평생 오리엔탈리즘을 연구하고 그것과 투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이 초래한, 철저히 구조화한 식민주의적 억압을 피부로 느꼈음을 뜻했다. 그가 열두 살 때 그의 조국은 없어졌다. 이어 열다섯 살 때인 1950년 미국에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영국의 제국주의 소설가 콘라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무렵 그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자각을 한다. 그 계기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아랍통일운동과 구분되어 독자 노선을 걷게 되면서였다.

그 후 사이드도 변했다. 그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인이 나라 없는 ‘난민’이자 테러리스트로 불리고, 자신을 주장하기는커녕 언제나 비난받는 존재로 왜곡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운명이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동양 전체의 것임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서양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된 동양은 자신을 주장하기는커녕 서양에 의해 자신이 표현된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서양인에 의해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이고, 그 학자나 예술가가 오리엔탈리스트들이라는 것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인식론적 폭력성에 전혀 무감각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을 식민주의자라고 규탄했다.
사이드는 197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국회 격인 PNC의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78년 <오리엔탈리즘>을 발표했다.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조작한 스타일인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정치·학문·예술·문학 등 서양 문화 전반을 비판한 이 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20세기 최대의 사상서이다. 이어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PNC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이 선언될 때 영어판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 그러나 그 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테러 노선을 걷게 되자 그는 그것을 철저히 비판하고 돌아섰다. 민족주의가 지나쳐 인종적 특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어 1993년 <오리엔탈리즘>의 속편인 <문화와 제국주의>를 발표한 데 이어 <지식인론> <자서전> <음악론> 등 2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냈다.

1992년부터 그는 백혈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최근 부시가 발표한 팔레스타인 평화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그의 평생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항한 투쟁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사상가였다. 그는 평생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지식인의 본분이라고 주장한 다양한 분야의 아마추어로서 망명자·고향상실자·아웃사이더로 자기 사회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비판적인 소수자로 살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과 민족, 그리고 문화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다문화주의에 의한 인류 통합과 공존, 유연과 관용을 주장했다. 21세기는 과연 사이드가 꿈꾼 그러한 시대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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