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문학 새 탈출구 ''강의 파괴''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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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법학 강, 문학으로 철학 읽기…일부 강의실은
서울대 관악 캠퍼스 제14동 103호 강의실은 매주 월요일 오후 4시만 되면 때 아닌 퍼포먼스 경연장으로 바뀐다. 일반 교양 과목 ‘과학과 문화’ 수업이 열리는 것이다.

강의는 주제 선정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학생들의 자율과 자치에 맡겨진다. 이 강의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수 강의가 없다. 다만 학생들이 주어진 주제에 맞게 준비한 한시간짜리 발표와, 이어 진행되는 토론이 있을 뿐이다. 강의를 듣는 학생 100여 명은 각각 10명 안팎으로 조를 짜, 매주 한번씩 돌아가며 발표회를 갖는다. 이 강의에는 시험도 없다.

발표회 형식과 내용은 기발하다. 얼마 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직접 김치를 담그는 깜짝쇼를 벌이기도 했다. 강의실은 주제에 따라 연극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퀴즈 대회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좀더 인상적인 발표’를 추구하는 학생들이 각자 준비한 비밀 병기를 경쟁적으로 터뜨리는 바람에 발표회 때마다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난 10월30일 이 강의실은 소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발표를 맡은 학생들이 이 날의 주제인 ‘수원 화성’을, 잘 짜인 1시간짜리 비디오 필름에 담아 내놓았던 것이다. 지난 8월 말 이 강의가 열린 뒤로 ‘천상열차분야지도’ ‘김치’ ‘자격루’ ‘풍수지리’ ‘수원 화성’ 등 대개 한국의 전통 문화와 과학이 만나고 있는 주제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다루어졌다.

수업을 이끌고 있는 신동원 박사(과학사)는 “일반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여겨지는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이런 방식의 수업을 생각해냈다”라고 말했다. 이 수업이 다루는 영역은 음악·미술·영화·문학·종교 등 제한이 없는데, 이번에는 한국 과학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는 뜻에서 한국 문화로 영역을 골라 잡았다.

신동원 박사의 강의실이 매번 퍼포먼스 공연장으로 변한다면, 지난 9월 숙명여대 정법학부에 처음 개설된 교양 강좌 ‘영화로 배우는 한국법과 미국법’이 진행되는 강의실은, 강좌 이름 그대로 학기 내내 주제가 있는 전용 소극장으로 둔갑한다.

‘영화로 배우는…’ 강의는 기본적으로는 법의 원리·형사법 절차·민사법 등 법 일반의 내용을 소개하는,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양 과목이다. 그러나 이 강의에서는 수업 때마다 강의실 교탁이 치워지고 대형 스크린이 내걸려 법정 영화 1~2 편이 상영된다.

교재로 쓸 만한 국산 법정 영화가 드문 탓에 수업 교재로 쓰이는 영화는 대개 미국산이다. 〈타임 투 킬〉 〈데드 맨 워킹〉 〈일급 살인〉 〈필라델피아〉 〈래리 플린트〉 등이 그것이다. 지난 11월3일 저녁 6~8시 이경규 교수가 맡은 강의에는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가 한편씩 나란히 상영되었다. 해리슨 포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의혹〉과, 하지원·안성기가 주연한 〈진실 게임〉이 형사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과 형사 절차 등 형사법을 토론하는 교재로 내걸렸던 것이다.

이 강의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 대학 이경규 교수(정법학부)의 ‘창안’으로 성사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교수가 영화를 교재로 해 대사까지 일일이 챙겨온 뒤 토론을 유도하고 숙제를 내는 수업을 인상 깊게 체험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지난해 숙명여대에 자리 잡자마자 ‘영화로 진행하는’ 강의 계획안을 교수들에게 제안했다. 이 제안은 마침 ‘연계 전공’이라는 새 제도를 시행 중인 대학측에 의해 즉각 수용되었다.
일종의 강의 파괴라 할 이같은 현상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학과 안경환 교수는 일찍이 1989년부터 강의 파괴의 원조 격이라 할 ‘법과 문학’을 이끌어오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같은 대학 신문학과 강현두 교수는 외부 인사를 초청해 자기 강의의 일부를 맡기는 형식을 시도한 바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고려대 철학과 교수였던 도올 김용옥씨도, 교수 시절부터 색다른 수업 방식을 시도해 강의 파괴의 선구자로 꼽힌다.이같은 시도들은 고작 한두 사람에 의한 실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같은 수업 방식을 대세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정도로 뚜렷한 흐름이 엿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외부 인사를 적극 동원하는 서울대 강현두 교수의 ‘대중 문화’ 강의이다. 이 강의는 원래는 1980년대 중반에 시도했다가 중단된 실패작이었다. 실패한 원인은 낯선 강의 방식에 대한 주변의 몰이해와 편견. 강교수의 의식이 일반의 의식을 너무 앞서간 것이 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다시 시작된 강교수의 ‘대중 문화’ 강의는 근래 들어서는 매번 강의 때마다 수강생 2백여 명이 몰려 북적대는 인기 강좌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8년 인기 가수 신해철씨를 초빙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강의 성공의 1차 요인은 물론 강의를 빛내는 쟁쟁한 초청 인사들의 면면이다. 그동안 강교수의 강의실에는 가수 신해철씨 외에 개그맨 김국진·축구 해설가 신문선·〈딴지일보〉 김어준 씨 등 그때그때 화제로 떠오른 명사들이 등장했다. 지난 봄학기(이 강의는 봄학기에만 진행된다)에는 개그맨 이홍렬·영화 〈거짓말〉 기획자 신 철·애니매이션 감독 이용배 씨가 다녀갔다.

하지만 강교수 강의가 성공한 데는 시대 변화라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대학 사회의 분위기가 과거 백안시했던 연예인·스타 들을 포용할 만큼 자유 분방해졌다는 뜻이다.

이같은 강의 파괴 바람을 인문학 분야의 젊은 교수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한국외대에서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탁석산 박사(서양철학)의 경우가 좋은 사례이다.

논리학의 한 갈래인 ‘오류학’을 강의하고 있는 탁박사 강의의 한 특징은, 철학과에서 무엇보다 중시되었던 원전을 타파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신문 칼럼을 학기 내내 ‘주 교재’로 활용한다. 강의는 매 시간 미리 읽어오도록 한 신문 칼럼에서 학생들과 오류를 찾아내는 것으로 일관한다. 시험도 신문 칼럼에서 오류 찾기. 이같은 시험 방식은 학생들의 평소 실력이 밑천이므로 이른바 ‘오픈 북’은 당연하다. “오류 찾기를 반복 학습함으로써 학생들은, 개강 무렵 나누어준 오류 유형 60여 개를 자유 자재로 활용해 남의 글을 분석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라고 탁박사는 말한다. 요컨대 탁박사 강의 파괴의 1차 취지는 잡다한 이론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대신, 철학 하기의 기본이라 할 논리 더듬기의 ‘실전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강의 형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면서 교수들의 위상과 역할에도 덩달아 변화가 일고 있다.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강의 방식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기획자’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람이 많은 만큼 부담도 늘어난다.
영화 수업을 진행하는 숙명여대 이경규 교수는 “학생들이야 한두 번 보면 끝나지만 가르치는 처지에서는 같은 영화를 네댓 번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일반 강의를 준비할 때보다 힘이 서너 배는 더 드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일부 교수와 젊은 강사들이 이같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강의 파괴’ 또는 ‘수업 혁명’에 매달리는 현상은, 대학 사회의 변화 몸부림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서울대가 발표한 ‘연합 전공제’ 실시안(왼쪽 상자 기사 참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의 파괴는 기본적으로 기존 대학 교육의 한계를 깨뜨리기 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에서의 인문학이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현실로부터 유리된 학문으로 지탄받아 왔다. 최근 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도가 두드러지는 까닭도 키에르케고르·하이데거·데카르트 등 서양 철학 거장들을 ‘주석’하는 데 그쳤던 국내 철학계의 풍토를 일변시키고자 하는 자성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전공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강의 파괴를 선도하는 교수들 자신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부산대 대학원에서 영화·문학 등을 적극 활용해 현대철학사조론을 강의해온 이왕주 교수(윤리철학)는 “명료한 결론과 경계가 뚜렷한 기승전결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분방한 사유 체험을 가로막는다. 여지껏 우리는 그런 식으로만 사고해 왔고 그것이 결국 철학을 생동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했다”라고 말한다. 강의 파괴는 이같은 고질에 효과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낯설고 때로는 튀는 듯이 보이는 강의 파괴 바람에 대해 대학 사회에서 거부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같은 흐름은 학부제와 교수평가제 실시 이후 한층 목소리가 거친 ‘수요자 중심 대학’ 논리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또 강의 파괴가 교수들 각자의 정교한 밑그림 없이 학생들의 인기도에 일방적으로 휘둘려 진행되거나 한때의 유행병처럼 번진다면, 학문이 설 자리는 더 비좁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강의 파괴를 꾀하는 교수들이 얼마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파괴 이후’를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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