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부산국제영화제/21세기 영화의 바다, 새 물결 출렁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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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제작사·배급사 연결하는 ‘공급 기지’로 자리매김
지난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PIFF·부산영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은 ‘영화는 인생에 많은 것을 알려주고 보여준다’는 영화인들의 말을 실감했다.

10월12일 밤, 부산시 초량2동에 사는 이철수씨(59)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해운대 근처 수영만에서 실내 수영장만한 스크린을 통해 30여년 만에 영화를 본 것이다. 영화 제목은 <의리 없는 전쟁>. 일본 야쿠자들의 배신과 의리를 통해 세상살이의 누추함을 보여준 영화로, 부산영화제 ‘새로운 물결’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었다. 이씨는 <귀신 잡는 해병>을 본 뒤 처음 영화를 보았다며 “지나온 인생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는 신유경씨(27)는 부산영화제를 통해 ‘개안’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뱀파이어 헌터 D>를 보고 자신이 하는 일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동료들과 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부산에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박정아씨(27)는 영화가 좋아 무작정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을 찾았다. 그는 낯선 곳에서 낯선 영화를 보면서 삶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는 영화제에 얼굴을 내민 사람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 문화와 경제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부산영화제 집행위 김지석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는 영화제 덕분에 부산이 활기 찬 도시가 되었고, 시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히 높아졌다고 말했다. 대표 문화 시설인 극장 시설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김씨는 경제적으로는 “부산 경제에 2백50억∼300억원 정도의 상승 효과를 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제5회 부산영화제는 성공적이었다. 쉰다섯 나라에서 2백여 작품이 참가해 양적으로 풍성했을 뿐 아니라, 질에서도 예년에 비해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둠 속의 댄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집으로 가는 길>,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티토의 정신>, 모스크바 영화제 대상 수상작 <성적으로 치명적인 전염병 같은 삶>,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 수상작 <아버지>가 영화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초청된 영화인의 면면도 화려했다. 빔 벤더스·지아장커·왕가위·모흐센 마흐말바프·크쥐시토프 자누쉬·자파르 파나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들. 그들은 관객과 만나 자신들의 영화 세계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한국 관객의 수준 높은 영화 지식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제1,2회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 프로젝트에 선정되었던 11개 작품이, 완성작으로 참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순환>(자파르 파나히 감독),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 <플랫폼>(지아장커 감독), 로카르노 영화제 은표범상 수상작 <리틀 청>(프루트 챈 감독)이 바로 PPP가 맺은 결실들이다.

올해 PPP에는 아시아 전역에서 1백50여 편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11개국 22편이 프로젝트로 뽑혔다. PPP 때문에 부산을 찾은 투자자·바이어·게스트가 5백 명이 넘었다. PPP는 이번이 세 번째이지만, 아시아 감독들의 작품 기획과 전세계의 제작사·배급사를 잇는 프리마켓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되었다.
영화 평론가 이효인씨는 그같은 성과와 함께, 이번 영화제가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예년에는 이런저런 영화를 나열만 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는 영화를 이슈화해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특히 타지키스탄 영화 <루나파파>와 우즈베키스탄 영화 <연설가> 등을 상영한 중앙아시아 특별전과, 이란의 마흐말바프 가족(120쪽 상자 기사 참조)의 영화전, 그리고 <춘향전>의 다양한 버전을 소개한 <춘향전> 특별전이 눈길을 모았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씨는 이번 축제의 중심을 아시아와 한국 영화에 두었다면서 “올해를 기점으로 이제 세계에서 아시아의 화제작을 보려면 남포동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유럽 영화를 선보이는 ‘월드 시네마’ 부문과,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새로운 물결’ 부문에 초청된 영화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년보다 형식과 주제가 빼어난 작품이 많았다.

좋은 영화에는 입소문으로 관객이 몰리게 마련이다. 개막작·폐막작은 예매 5분 만에 표가 동 났다. 지앙원 감독의 <귀신이 온다>, 빔 벤더스 감독의 <밀리언 달러>, 로우 예 감독의 <수쥬>,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순환> 등은 새로운 영상미와 색다른 주제 때문에 첫회가 상영된 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관마다 관객이 몰리자 일본 영화 평론가 요모다 이누히코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는 등 행사 운영에서 자잘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부산영화제가 도쿄 영화제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옥에 티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 예매 시스템이 자주 다운되어 관객들의 불평을 샀다. 또 모든 작품을 단 2회만 상영해, 소문이 난 영화를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외국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낮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평론가들은 한국 영화 프로그래밍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영화를 나열하지 않고, 한국 영화의 특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느와르만을 모으거나 남북 문제를 다룬 작품만을 묶었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인> <정> <세기말>처럼 이미 극장에 걸었던 작품을 내놓은 것도, 관객의 관심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와이드 앵글 부문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 단편 영화가 너무 적어 한국 독립 영화의 ‘오늘’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 파노라마처럼 나열만 할 것이 아니라, 경향이나 주제 별로 묶어 관객에게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야외 상영장이 행사장인 남포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일부 극장의 낙후한 시설, 그리고 30∼40대 관객을 끌어들일 만한 영화나 행사가 적었던 것도 작은 문제점으로 거론되었다. 부산에 사는 회사원 김창준씨(34)는 “나이 먹은 관객을 영화관으로 오게 하려면, 작품성 있는 영화도 좋지만 성인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풍성한 화제를 낳았던 부산영화제는 폐막작 <화양연화>(왕가위 감독)를 상영하고 뉴 커런츠(새 물결) 상을 마르지예 매쉬키니가 받으면서 막을 내렸다. 영화인들은 이번 영화제가 부산을 아시아 화제작을 맨 처음 선보이는 곳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든 누벨바그의 기수 고다르는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시네마 테크에서 배웠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시네마 테크는 영화도 보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영화의 메카이다. 부산이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시네마 테크가 되어 미래의 고다르가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부산에서 배웠다’고 말하게 하려면, 재정을 더 많이 확보하고, 새로운 행사를 발굴하는 일에 좀더 힘써야 한다.

부산·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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