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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출판] 코미디언 배삼룡 자서전에 담긴‘바보 철학’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 젖은 웃음> 펴낸 코미디언 배삼룡씨

魯順同 기자 ㅣ | 승인 2000.01.1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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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이 배삼룡의 진면목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바람만 불어도 픽픽 넘어지는 폼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가 왜 한 시대를 풍미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는 연기 이전에 얼굴이, 움직임 이전에 몸가눔부터가 이미 사람을 웃음으로 이끌었다. 그에게도 요즘으로 치자면, 유행어가 하나 있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항변하듯 내뱉던 ‘내가 뭘…’이라는 대사다. “바보 같은 내가 변명 삼아 하는 말이기도 했고, 놀림감이 되는 게 억울해 버티기 식으로 중얼거려 본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바보는 스스로 시대와 맞서는 법은 없지만, 속도전 시대의 무지막지한 완력을 일순 무력화하는 신통한 효험이 있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그로서는 촘촘하고 번지르한 요즘 세태가 영 마뜩치 않다. “요즘 바보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존재더라. 길에서 바보 같은 사람을 보면 피해를 볼까 싶어 도망가기 바쁘다.”

바보 연기로 서민의 모습 생생히 그려

그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인생 자체가 코미디와 닮았다고 말한다. 눈물 나도록 웃긴다는 말처럼, 약하고 어리석은 탓에 내내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 젖은 웃음>(다른우리 펴냄)에서 자신이 당한 일뿐 아니라, 마음이 약한 탓에 자신이 남 못할 일 시킨 것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역시 돈과 여자에 얽힌 사연이 가장 많다. 배삼룡이 총각인 줄 알고 병문안 온 배우 미스 조와 아내가 대면한 장면은 말 그대로 코미디다. 가수 미스 K와의 염문은 희비극이라고 할 만하다.

“공연을 하다 보면 단원의 반수 이상이 여인네인데다가 한번 출발하면 6개월에서 1년간 계속된다. 객지 생활을 하다 보면 정이 가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특별히 방탕했던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견디자면 어쩔 수 없기도 했다”라고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1950년대 초부터 악극 무대에 섰던 그에게 현대사의 격변은 극장 풍경과 함께 기억되는 듯했다. 이를테면 4·19는 ‘빗자루로 쓸어내듯 손님을 깡그리 앗아간 사건’으로 남아 있다. 당시 극장은 이미 영화에 점령당하기 시작했던 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성 국극이 인기를 끌던 때였다. 반면 5·16은 연예인에게 유례 없는 호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출연료를 선불해 주는 ‘연예인 궐기단’이 창단되었던 것이다. 뒤에 신문사 사장을 지낸 장모씨가 단장이었고, 편성도 몇 소대 몇 소대 하는 군대식이었다. 이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5·16 지지 계몽쇼를 했다고 한다. 일종의 문화선전대였던 셈이다.

1960년대 초 등장한 텔레비전은 극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쇼 무대에만 섰던 그는 최초의 상업 방송국인 HLKV 문화방송국 <웃겨보세요>를 통해 전파를 타고, KBS <명랑교실>에도 출연했다. 간판 프로는 역시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 1969년 8월 MBC 텔레비전이 개국하자 그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그가 처음 맡은 배역은 우편배달부였다. 대사는 ‘편지 왔어요’라는 단 한마디. 하지만 도배지가 널려 있는 마당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는 연기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험 삼아 직접 대본을 쓰기도 했다. 20년 무대 경험을 통해, 경험칙을 터득한 터였다. 그는 갓 상경한 촌사람이 고무신을 벗고 택시에 오르거나, 시골 노파가 소매치기를 뒤쫓는 장면을 놓고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은 남의 비극 앞에서 동정심을 발휘하기보다는 경계심을 풀고 웃어 버리는 성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 그는 도둑놈으로 분장하든 신입 사원 역을 맡든 언제나 나사 하나가 빠진 얼간이었다.

이 와중에도 개인적인 고충은 계속되었다. 한동안 빚에 몰리다 못해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로 그는 궁핍에 시달렸던 것이다. 녹화가 있는 수요일이면 정동 MBC 스튜디오에는 빚쟁이들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국보급 금불상 사기 사건은, 그 시절이 남긴 우울한 일화다. 악순환이 계속되던 어느 날, 신문에서 가짜 국보급 금불상에 관한 기사를 읽고 모방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후 그의 주가는 치솟아 1973년에는 급기야‘백주의 납치극’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양 방송사 직원 수십 명이 출동해 그를 쟁탈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상황을 모면한 방법도 그답다. 눈 딱 감고 그대로 졸도한 것이다. 부랴부랴 의사가 달려오고 신경 안정제를 놓는다, 입원을 시킨다 하고 야단법석이 났다.

전성기는 오래 이어졌고 그만큼 사건도 숱하다. 한번은 브라운관의 그를 보고, ‘저게 너희 아빠’라고 놀리는 것을 그대로 믿은 한 꼬마가 녹화장에 찾아오는 바람에 ‘배삼룡의 숨겨둔 아이 어쩌고’하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가끔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스튜디오 부근 병원(옛 고려병원)에 며칠씩 입원하기도 했는데, 이를 알아챈 기자들이 ‘배삼룡이 머리가 나빠지는 것 아니냐. 연기가 아니라 진짜 바보가 아니냐’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만큼 연기는 감쪽같았고, 주가는 올라갔다.

엉겁결에 시작한 음료회사 ‘삼룡 사와’가 무너지면서 채권자로부터 피소되었는데 그는 재기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배씨에 따르면, 공공연하게 김종필씨를 지지했던 그는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대에 역행하고,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고 한다. 밤이면 ‘삼청교육대 맛 좀 볼래?’식의 괴전화에 시달렸던 시절, ‘딱 3개월만 밖에서 쉬고 오자’며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 무려 3년이 되었다.

그의 전성 시대는 갔다. 이제 배삼룡은 추억담 속의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페이소스의 코미디언’이라고 평한다. 찰리 채플린이 공황기 미국 서민의 애환을 그렸다면 한국의 배삼룡은 성장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허둥대는 보통 사람의 난감함을 끄집어냈다는 것이다. 그가 코리아 리서치가 조사한 ‘20세기를 빛낸 대중문화예술인’가운데 코미디 부문 1위로 꼽힌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도 자신을 안다. 그는 ‘나는 미진아다. 도시화해 가는 한국의 촌뜨기요, 공업화해 가는 세상의 농사꾼이다 … 명동의 부츠 신은 아가씨들 틈에 낀 짚신 신은 지게꾼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10년 전부터 경기도 퇴촌에서 사는 그는 가끔 상을 받거나 후배들 상을 주어야 할 때 서울로 출타할 뿐, 그곳에서 달고 나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벽난로 옆에는 손수 그림을 새겨 넣은 도자기며, 채 마무리짓지 못한 풍경화가 놓여 있었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해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이다. 기자를 맞기 전 그는 낮잠을 즐긴 듯 했다. 방문을 나서는 그의 한쪽 볼에 베개 자국이 선명했다. 낮에 ‘수양딸’인 코미디언 최용순씨에게 병문안을 다녀왔다는데, 한낮의 외출에도 피곤함을 느끼는 것을 보니, 그의 나이가 일흔넷이라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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