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전문화''로 성공한 신생 출판사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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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신생 출판사들, 한 우물 파기·가로지르기 등 다양한 시도로 시장에 새 바람
작지만 단단한 출판사들이 IMF 이후 한동안 침체되었던 출판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첨병이 되고 있다. 생긴 지 길어야 5년 안팎에, 직원이라고 해야 사장·직원 다 합쳐 겨우 다섯 손가락을 헤아리기 십상인 소규모 신생 출판사. 이런 출판사들이 눈에 띄는 편집과 참신한 감각에, 지식 산업 종사자라는 사명감과 독자에 대한 ‘애틋한’ 봉사 정신까지 곁들여 IMF 여파로 붕괴되었던 출판 시장을 재건하는 데 든든한 기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상〉 편집위원인 최성균씨, 출판 평론가 임상범씨 등 출판 관계 전문가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매운 고추’라고 추천하는 출판사 명단에는, 효형·이 끌리오(예술·인문 분야), 이산·주류성(역사·인문 분야), 예문서원·동과서(철학·인문), 삼인·이후(사회과학·인문), 지성·지호·궁리(과학·인문) 등 줄잡아 20여 출판사가 오르내린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이제 막 등록을 마친 출판사들, 대형 출판사에서 자회사 형태로 분가해 나가면서 ‘전문 출판’을 선언하고 나선 한길아트·사이언스북스 등을 합치면 매운 고추 명단에 오를 출판사는 더 늘어난다.

주관이 뚜렷하고, 장인 정신으로 무장했으며, 게다가 젊음이 넘친다는 것이 이들 출판사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공통점은 이들이 한결같이 ‘인문학 부흥’을 부르짖으며 나름으로 전공을 정해 출판계의 숙제인 전문화를 알차게 소화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전공을 정해놓고 공부하듯이 책을 펴내온 신생 출판사로는 역사·인문 분야에서 이산이 정평이 나 있다. 이산은 처음부터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를 자신의 전공으로 선언하고 이와 관련된 해외 양서를 집중 발굴해 펴내 왔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전2권),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 〈그림 속의 그림〉 등은 역사서이면서도 동시에 인문·예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산의 고품격 생산물이다.

강인황·문현숙 씨 단둘이서 출판의 모든 일을 다 해내는 부부 출판사로 잘 알려진 이산의 출판 특징은, 출판사의 이름(‘우직한 사람이 산을 움직인다’는 한자 성어 移山에서 따옴)대로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전력투구한다는 것이다. 한 권 한 권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는 바람에 이산은 책 한 권을 펴내는 데 1년을 넘기기 일쑤다.

이산이 출판계에 처음 존재를 알린 책은, 재일 학자 강상중씨가 국내에 본격 소개되는 계기를 만든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1997년)이다. 이산은 최근 세계사 쪽으로도 전공 분야를 확대해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전문 출판사를 내고, 소규모 출판사로는 힘에 부칠 만한 두께 7백쪽짜리 〈20세기의 역사〉 완역 출판 작업을 전문가 수십명을 동원해 밀어붙이기도 했다.

전문성과 감각을 겸비한 데다가 의욕과 투지가 넘치는 출판사로는 단연 이 끌리오(전 끌리오)를 들 수 있다. 서양 지성계의 출판 성과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생각하는 글들’ 시리즈와, 청소년 독자를 겨냥해 과학서를 주로 펴내온 이 출판사는 이제 겨우 창사 2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그야말로 햇병아리 출판사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이 끌리오는 23종이 넘는 책, 그것도 자타가 공인하는 양서들을 독서 시장에 쏟아냈다. 1년 출판 목록에 신간 서너 권 채우기가 바쁜 것이 일반적인 국내 출판계 현실에 비추어볼 때 꽤 놀라운 실적이다. 이 중 지난해 나온 〈앵무새의 정리〉(전3권) 등 몇 권은 ‘좋은 책’이라는 명성과 함께 짭짤한 수입을 안겨주었다.

이 끌리오 박재환 사장은 이론과 현장성을 두루 겸비한, 말 그대로 신세대 전문 편집자이다. 그 자신이 출판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전 해외 유학(서양사 전공)을 거치고,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몇 년간 출판 실무까지 익힌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박사장은 이같은 학문 이력과 현장 경험을 살려 ‘해외 인문학 성과를 본격 소개해 국내 독서계의 교양 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을 자기네 할 일로 정했다.
학제간 벽 허문 ‘가로지르기’ 출판 활발

신생 출판사들이 맹활약하면서 최근 출판계에서는 ‘가로지르기’라는 용어가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가로지르기란 말하자면 학제간 벽 허물기를 쉽게 풀이한 용어다. 그동안 지식인·학자 들의 글쓰기는 물론 이들의 글을 담아내는 출판마저 ‘지나치게 전공에만 얽매여 지식 공유와 확산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는 반성 끝에 가로지르기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가로지르기가 전에 없던 경향은 아니었고 신생 출판사의 전유물도 아니지만, 최근 눈에 띄는 결과물의 상당수는 이들 신생 출판사의 작품이다.

가로지르기 시도는 특히 역사·예술·철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인문의 예술화, 예술의 교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에 간다〉(1997년)를 효시로 지난 3~4년 동안 인문학과 예술을 결합한 책을 집중적으로 펴낸 효형은, 일찌감치 가로지르기 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적극 실현해온 출판사 중 하나다.

특히 효형이 펴낸 〈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1998년)은, 이 출판사 송영만 사장 자신도 자부하는 가로지르기 시도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조선 정조 시대의 문화적 우수성을 딱딱한 학술적 관점이 아닌 쉬운 설명체로 해설한 이 책은, 지은이(서울대 한영우 교수) 자신이 면밀한 고증을 거쳐 직접 복원한 ‘반차도(班次圖·정조대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임금 행차 그림)’의 장면을 유려한 원색 화보로 국내에서 처음 소개해 관심을 모았다.

가로지르기 작업은 과학물 출판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연사 박물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성사, 미시적인 주제 또는 대상으로 과학·철학을 아우르는 책을 집중적으로 펴낸 지호 등은 모두 이 계열에 속하는 과학 전문 출판사로 알려져 있다. 〈상어〉(1999년) 〈신갈나무 투쟁기〉(1999년)를 내놓은 지성사는 자연 과학 서적에 인문학과 미술을 접목해 생기를 불어넣는 ‘장기’가 있다. 몇 년째 과학사·과학 사상 분야를 꾸준히 천착해온 지호 역시 지금까지 40종 가까운 신종을 내면서도 편집에 한번도 같은 포맷을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해왔다.

한 분야를 천착하는 이른바 ‘한 우물 파기’작업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출판계에서 ‘사회 과학의 시대’로 기억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홍승권씨의 삼인, 역시 1980년대 후반 학번으로서 이른바 운동권에 몸 담았던 이일규씨의 이후 등은 ‘사회과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으로 한 우물을 파는 전문 출판사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삼인은 IMF 한파 때문에 재정난에 허덕이던 1998년께, 역시 돈 문제로 문 닫을 위기에 놓였던 진보적인 사회평론지 〈당대 비평〉을 ‘의무감’ 하나로 인수해 악전고투 끝에 되살린 실적이 있다. 좌파적 성향의 사회과학 서적을 소개해온 이후는 〈폭력의 세기〉(한나 아렌트 지음) 등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화제작을 여러 권 내놓았다.

반면 원전 번역물과 국내 저작물을 꾸준히 책으로 매만져온 예문서원·동연 등은 동양학·한국학 분야에서 역시 한 우물 파기로 정평이 난 신생 출판사들이다. 이 중 1993년 설립된 예문서원은 ‘품은 많이 들지만 생색은 별로 나지 않아’ 남들이 손대기를 꺼리는 한문 원전 번역 작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도올 김용옥의 ‘노자 철학’ 강의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왕피(王弼) 주석본 〈노자〉, 금세기 최고의 〈주역〉 해석서로 꼽히는 〈고형의 주역〉 등은, 이 출판사가 이미 1990년대 말 국내에 처음 소개하거나 초역한 동양학 분야의 대표작이다.

개성 있는 작업 방식으로 저마다 ‘성깔 있는’ 책들을 펴냄으로써 독서계의 호응과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신생 출판사들이지만, 이들 앞에는 그간 일구어낸 성과 못지 않게 뛰어넘어야 할 걸림돌과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인문학 붕괴’는 출판계 최대의 적

특히 학술적인 내용을, 쉬운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풀어낼 줄 아는 능력 있는 필자(또는 번역자)가 태부족인 현실은, 출판 전문화를 통해 지식 대중화를 끌어내려는 이들의 의욕을 꺾는 1차 장애물이다. 특히 과학서 출판을 ‘전공’으로 삼는 출판사들에게 필자 구하기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더 큰 형편. 지성사 이원중 사장은 “과학 분야에서 국내 필자 발굴은 출판계는 물론 학계 전체로 볼 때에도 매우 절실한 과제다. 현재 이 분야에서는 외국 서적 번역물이 독자 수요를 메우고 있지만, 번역은 ‘재생산이 안된다’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한다. 예술물 출판의 경우는 도판·화보 등의 저작권 문제가 출판 전문화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무어니 무어니 해도 신생 출판사들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주범은 ‘인문학 붕괴’라는 사회 현상이다. “벌써부터 여파가 감지되고 있다. IMF가 한창일 때보다 오히려 요즘 들어 책 만들기가 더 힘들어졌음을 새삼 느끼고 있다”라고 이 끌리오 박재환 사장은 말한다. 이같은 분위기가 지속될 경우, 기성 출판사의 분전과 의욕 넘치는 신생 출판사의 참신한 시도로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출판계의 인문학 르네상스는 조만간 퇴출될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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