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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 영화 경쟁력 높인 프로듀서 3인

한국 영화 경쟁력 높인 프로듀서들/신 철·차승재·심재명, 탁월한 감각·노하우로 화제작 양산

노순동 기자 ㅣ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1.2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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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보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심미안을 과시하는 뜻으로 쓰던 때가 있었다. 외국 직배사가 직접 한국 시장에 영화를 풀어놓을 수 있게 된 89년 께에도 영화 팬들의 인식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이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눈총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직배 허용 10년 만에 불거진 스크린 쿼터(한국 영화 의무 상영일수 할당 제도) 논란은 달라진 한국 영화의 위상을 짚어볼 계기를 마련했다. 문화 주권을 내줄 수 없다는 원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국 영화가 보호할 만한 산업, 즉 경쟁력이 있는 제조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관객들의 태도가 ‘한국 영화는 안 본다’에서 ‘한국 영화도 볼 만해졌다’로 바뀌었음은 통계에서 확인된다. 한국영화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84년에 30% 대가 허물어진 이후 계속 20% 선에서 맴돌던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93년에 15.9%로 최저점을 기록한 뒤 상승세로 돌아섰다. 97년 시장 점유율은 25.5%. 이처럼 할리우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자국 영화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다.

97년 한국 영화 편당 관객, 외국 작품 압도

작품당 관객 수를 비교해도 경쟁력은 만만치 않다. 97년 한국 영화의 편당 서울 관객 수는 8만4천명이며, 직배를 포함한 외국 영화의 경우는 5만5천 명(대형 흥행작이 몰려 있는 직배 영화만 계산하면 15만4천명)이다. 제작 편수를 감안하면 관객 점유율의 의미는 더욱 깊다. 제작 자유화 이후 89∼91년 백 편 넘게 만들어지던 한국 영화가 이후 60∼50편으로 급감했는데도 오히려 관객이 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주간지 <버라이어티>도 97∼98년의 통계를 들면서 이같은 현상을 보도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는 데서 원인을 찾든, 감각 있는 신인 감독들의 등장에서 원인을 찾든 그 중심에는 90년대 들어 새롭게 출현한 영화 기획자, 즉 프로듀서들이 버티고 있다.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고 기존 충무로가 재편되던 시기에 등장한 신 철· 안동규·유인택 3인은 기획 1세대로 불리면서 기획 영화 붐을 주도했다.

이들이 활약한 10년 동안 충무로는 전례 없는 지각 변동을 겪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한국 영화에 애정이 없는 영화 제작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점이다. 외화를 수입해서 돈을 벌고, 수입에 필요한 쿼터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영화를 찍어대던 제작자들이 설 땅이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제작되는 영화 70% 이상이 20명 남짓한 기획자들의 손을 거친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높인 주역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의 성취와 한계를 논할 때, 이는 곧 프로듀서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한국 영화로도 장사를 하는 게 어디냐’에서부터 ‘장사만 하면 뭐하냐’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를 향해 쏟아지는 칭찬과 질타는 영화 제작에서 이들이 핵심적인 존재임을 보여 준다. 비록 이들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해도 한국 영화의 산업적 기반을 다진 공로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프로듀서로 활동한 기간이 10년째에 이르면서 이들의 색깔도 다양해졌다. 탁월한 흥행 감각을 선보이고 있는 신 철씨, 영화 마케팅의 귀재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여성 기획자 심재명씨, 항상 새로운 감각으로 승부한다는 차승재씨 등은 그런 다양한 경향을 대표한다.

최근 여의사와 폭력배 두목의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 <약속>이 지난해 흥행작 <여고 괴담>의 기록을 깨면서 신 철씨는 흥행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은행나무 침대> <편지>에 이어 3연타석 홈런을 날린 셈이다. 89년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를 통해 젊은 기획자의 탄생을 알린 지 꼭 10년 만의 일이다.

신 철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결혼 이야기>이다. 기획 영화의 효시인 이 작품의 스타는 배우도 감독도 아닌, 기획사 ‘신씨네’였다. 설문 조사를 통해 에피소드를 뽑고 시나리오를 구성한 이 작품은, 영화가 작가의 영감 어린 창작물일 뿐 아니라 기획을 통해 생산되는 문화 상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스터 맘마> <결혼 이야기 2>로 로맨틱 코미디 붐을 주도했던 그는 <구미호> <은행나무 침대> 등을 만들면서 특수 효과를 도입했으며, 이어 <편지> <약속> 같은 멜로 영화에 눈을 돌렸다.
신 철, 멜로 영화 연속 히트해 입지 굳혀

돌아보면 막 충무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대기업과 합리적인 사업 방식을 가진 신진 프로듀서의 결합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신 철씨가 처음 기획사 신씨네를 차렸을 때는 영화계 사람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개중에는 신씨가 영화에 돈을 대겠다는 것인지 홍보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돈과 연출력을 이어 주는 기획자 개념이 생소했던 탓이다.

전문 프로덕션 시대를 열었던 신 철씨는 요즘 프로듀서의 역할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일이 늘었다. 최근 제작한 <편지> <약속>을 두고 초기의 도전적인 실험 정신이 퇴색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멜로 취향에 기대고 있다는 비평을 접할 때면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관객이 많이 몰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그는 “이런 작품이 진부한 신파 영화라면 여기에 몰리는 한국 관객이 바보란 말이냐”라고 반문한다.

그가 요즘 신진 프로듀서들과 달리 이정국·김유진 등 중견 감독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나름의 소신 때문이다. 영화가 어느 특정한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중견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견 감독들은 한국적인 정서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다.”

신씨는 영화를 평가하는 데도 거품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방에는 변변한 공연장 하나 없는 곳이 허다하고 1년에 겨우 한두 번 극장을 찾는 관객이 수두룩한데도 영화를 평가하는 잣대가 미개봉작까지 샅샅이 뒤져 보는 젊은 관객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신씨네의 신 철 씨가 대중의 감성을 겨냥한 영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입장이라면 우노필름의 신진 프로듀서 차승재씨는 조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우노필름이 제작한 영화 중에서 관객이 50만명(서울 기준)을 넘긴 예가 드물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유망한 프로듀서로 평가되고 있다.

차승재씨가 관객의 성향을 분류하는 방식을 보면 그의 제작 노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니아 취향을 가진 관객이 5%, 성찰적 관객이 10∼15%, 대중적인 감성을 가진 관객이 60% 정도라고 본다. 이럴 때 가장 안전한 노선은 대중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10∼15%를 겨냥하는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대중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쉽다거나,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대중 영화가 많은 충무로에서 나름의 균형추 역할을 맡자는 것이다.”

청춘 영화 <비트>, 멜로 영화의 관습을 벗어났다고 평가받은 <8월의 크리스마스>, 관객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던 <처녀들의 저녁 식사>, 최근작 <태양은 없다>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차승재, 새로운 도전 계속

그는 대안 문화의 힘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신세대 프로듀서들의 대표 주자다. 대안적인 흐름이 주류에 자극을 주는 풍토라야 문화가 발전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선을 삼포식 경작에 비유했다. 당장 장사가 된다고 해서 비슷한 장르의 영화만 내놓으면 곧 물건이 바닥난다는 논리다.

그가 남들에 비해 다양한 색깔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연간 제작 편수가 많기 때문이다. 한 작품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곧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전보다는 도전을 택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모텔 선인장>(연출 박기용)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비트>(연출 김성수)가 성공을 거두어 손해를 보전한 것이 좋은 예이다.

<코르셋>으로 기획자 신고를 한 명필름의 심재명씨는 새로운 영화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차승재씨와 자주 비교된다. 자신의 첫 작품 <코르셋>이 ‘신나는 여성 영화였지만 어눌한 상업 영화였다’고 자평하는 심씨는 <접속> <조용한 가족>으로 명성을 굳혔다.

홍보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기획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명필름의 성공을 마케팅 덕으로 돌려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상품이 새로워야 포장도 쉬운 법이다. <접속>은 단지 신세대 취향에 편승한 멜로 영화가 아니다. 또 <조용한 가족> 이전에 한국에 코믹 스릴러라는 장르가 있었는가? ”

새로우면서도 팔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기획자들의 숙원이다. ‘매끈한 구식 상품보다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것이 좋다’는 것이 창작자들의 마음이라면, 시장에 그런 영화를 내다 팔아야 하는 기획자들로서는 그 이상의 고민이 필요하다. 창의성을 다치지 않으면서 대중에게 파고들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프로듀서들은 내용이 밋밋할 경우 스타를 캐스팅해 주목성을 높인다거나, 반대로 내용이 파격적일 경우 형식을 단아하게 하는 식으로 마케팅 포인트를 개발한다.

심재명,마케팅 감각 특출

줄거리가 잔잔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캐스팅에 공을 들였고, 불륜을 다룬 <정사>는 단색 톤의 화면으로 깔끔한 인상을 주려고 애쓴 예에 속한다.

영화사의 제안이 작가(감독)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프로듀서의 몫이다. <여고 괴담>으로 기획력을 인정받은 프리랜서 프로듀서 오기민씨나 <넘버 3>의 프로듀서 김인수씨는 연출자를 영화의 중심에 놓고 생각함으로써 갈등을 줄인다.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다. 프로듀서는 그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물론 파격성이 지나칠 경우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자고 설득한다. 그러자면 프로듀서가 감독 못지 않은 안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오기민씨는 “당장 완성도가 높지 않더라도 싹수 있는 시나리오를 골라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프로듀서가 내놓는 제안이라면 감독이 간섭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는 프로듀서들이 대부분 극장의 홍보 담당자로, 연출부의 막내로 출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획자들은 돈이 많아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 자체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 제작에 뛰어들고 있으므로 한국 영화의 전망이 밝다”라고 신 철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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