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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모르는 ‘삼국지 열풍’

처세술 교본·논술 교과서로 활용… 역사 아닌 소설로 읽어야

김언종 (고려대 고수·한문학) ㅣ 승인 1997.10.0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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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어렵다지만 <삼국지> 시장은 불황에 아랑곳없이 늘 뜨겁다. 일본판 만화 <삼국지>를 열 번도 더 보아 <삼국지> 도사가 되었다는 꼬마들이 전국 곳곳에서 속출하는가 하면, 수능 시험을 앞둔 고교생들에게는 소설 <삼국지>가 논술 시험 ‘교과서’가 되어 있으며, 대학생들에게는 재독해야 할 고전이 되어 있다고도 한다. 여기에다 엄청난 물량을 투입했다는 중국판 비디오 <삼국지>까지 출시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삼국지> 팬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국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데, 원산지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표현 형식을 소설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돌이켜 보면 광복 이후 지금까지 문단의 여러 고수들이 많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삼국지>를 번역하거나 평역했다. 90년대에 들어서만도 이문열의 <삼국지>가 있고, 얼마전 김홍신의 <삼국지>가 출간되었으며, 옥중의 황석영도 구상 중이라는 풍문이 들린다. 어쩌면 이들 외에도 ‘언젠가는 나도…’라고 다짐하고 있는 작가들이 융중(隆中)의 제갈량처럼 출판업자들의 삼고초려를 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10여 년쯤은 1년에 몇억 원의 인세가 보장되는 황금 거위가 눈에 삼삼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작가 개인의 성취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못된다.

우선 번역을 하건 평역을 하건 원본을 노름꾼 화투장 만지듯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한문 실력을 닦는 데 참으로 적잖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야 하고, 집필에도 몇 년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을 살찌우는 일이 아닌 이 일에 우리의 일류 작가들이 금쪽같이 귀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도 좋을까.

<삼국지>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처럼 중국 소설을 대표하는 최고 명작이 아니다. 중국의 고대 소설 가운데는 <홍루몽> <수호전> 같이 예술적 성취도가 <삼국지>를 능가하는 작품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삼국지>처럼 방대한 규모와 진진한 흥미로 독자를 붙들어매는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직보다 권모 술수 높이치는 역기능도 있어

원작자 나관중(羅貫中)은 원나라 말엽 농민 의거군의 수령 가운데 한 사람인 장사성(張士誠)의 막객(幕客)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가 어지러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뒤집고자 혁명가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한 나관중의 의식을 지배하는 사상은 뜻밖에도 유가 사상이다. 그러나 그는 <삼국지>를 유가 사상을 선전하는 도덕 교과서 수준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가로서 그의 위대함이자 <삼국지>라는 소설이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삼국지>만큼 수많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전형화하여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은 드물다. 유비의 인자함, 조조의 교활과 잔인성, 관우의 충의, 장비의 용맹, 제갈량의 지략과 충성, 동탁의 탐욕, 여포의 우둔, 사마의의 모략, 손권의 지모, 주유의 총명, 노숙의 신중은 모든 독자의 뇌리에 선명히 찍혀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삼국지>는 이러한 수많은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사건 전개를 통하여 복잡다단한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대처할 갖가지 지혜를 제공한다. 특히 정치가·군인·기업인 들은 읽지 않는 것 자체가 손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군데군데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창작 기교상의 패필(敗筆)과는 또 다르게, 허황하고 과장된 흥미 위주의 일부 내용은 독자의 현실 감각을 상실케 한다. 또 사리 사욕에 눈이 멀어 배신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군상들의 비열한 행위는 독자들에게 세상이 권모 술수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을 주어, 정직성과 선량한 미덕을 불신케 하고 음모와 패도(覇道)의 길을 천박하게 모방하게끔 조장하기도 한다.
누누이 환기되고 있지만 <삼국지>는 역사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삼국 시대로 알려진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 97년 간의 역사를 축으로 하여 온갖 허구를 교직해 만든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의 줄임말이다. 연의의 본뜻은 ‘의리를 드러내어 발휘함’이다. 그러나 <삼국지통속연의>는 그것이 표방하는 바와 달리 허구에 더 무게를 두고 말았다. 따라서 ‘통속 연의’는 바로 ‘소설’의 다른 말이 되었다.

희대의 이야기꾼 나관중은 역사서 <삼국지>에 어느 정도의 허구를 비벼 넣어 흥미진진한 소설 <삼국지>로 만들었을까? 답은 옛날에 이미 나와 있었다. 사실 70%, 허구 30%. 그러나 이 시대의 관련 학자들은 70%가 사실이라는 것도 믿지 않으려는 분위기이다. 연구하면 할수록 허구의 비중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허구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소설 <삼국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적잖은 실망감을 주겠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주면서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력을 검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원 결의는 사실이 아니다. 나이도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많았다. 독우(督郵)를 죽도록 패준 사람은 장비가 아니라 유비였다. 장비와 유비의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뒤바꾼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조의 동탁 암살 미수 사건도 허구이다. 동탁의 아낌을 받던 조조는 동탁이 실패하리라 예견하고 그저 달아난 것이었다.

조조가 망명 중에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오해해 친구 여백사의 가족을 죽이고 길에서 만난 여백사까지 죽였다는 일화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여백사의 가족은 조조의 말과 재물을 빼앗으려다 죽었다고 전해지며, 출타했던 여백사는 조조와 만나지 못했다. 여백사 살해는 조조의 악독함을 부각하는 조미료로 삽입된 것이다.

소설에서는 동탁 휘하의 맹장 화웅의 목이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날아가지만, 실제의 화웅은 손견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또 관우가 82근 (!)짜리 청룡언월도를 젓가락처럼 휘둘러 적장의 목을 무 자르듯이 하지만 실제로 관우는 이 칼을 든 적도 없다. 여포의 방천화극도 마찬가지이다. 청룡언월도나 방천화극은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후대의 의장용 무기이다.

왕윤의 양녀로서 서시·왕소군·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꼽히기도 하는 초선은 가공 인물이다. 그는 동탁과 여포를 갈라놓는 데 쓰인 매력적인 소도구일 뿐이다. 또 조조가 죽으면서 도굴을 염려해 가짜 무덤을 72개나 만들게 했다는 것도 허구이다. 조조의 무덤은 그가 유언한 대로 위군(魏郡), 즉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에 만들어졌다.

작가가 가장 애정을 쏟은 인물은 제갈량이다. 당연히 그에 관한 허구가 수두룩하다. 삼고초려로 유비의 진영에 가담한 제갈량이 그 귀신같은 지모를 써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박망파(博望坡)의 승첩은 가공한 사건이다. 당시 제갈량은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고, 삼고초려는 그로부터 5년 후의 일이다. 제갈량의 두 번째 승첩인 신야(新野)의 싸움도 사실이 아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올 때 동오의 투항파(投降派)를 설복한 사람은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였다. 적벽대전 때 동남풍이 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갈량이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불게 했다는 것은 가공이다. 대패한 조조가 화용도를 거쳐 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우가 매복해 있다가 조조를 놓아 주었다거나 제갈량이 그럴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도 꾸민 이야기이다. 주유가 제갈량의 재능을 시기하다가 화병(火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나, ‘하늘이 주유를 낳고 어찌 제갈량을 낳으셨나’라는 주유의 피맺힌 절규도 허구이다.

이러한 허구는 굵직한 것만 쳐도 백 가지를 넘는다. <삼국지>가 그렇게도 재미있게 읽히는 데는 웅대한 규모와 깊이 있는 사건 전개 그리고 복잡 다단하게 맞물리며 명멸하는 인간들의 운명뿐 아니라 이러한 허구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삼국지>의 단점과 한계 또한 그러한 허구들과 관련되어 있음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삼국지> 열기는 아무래도 의아롭고, 작단(作壇)으로 눈을 돌리면 어쩐지 아쉬워진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삼국지>가 기다려지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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