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기행]<삼국지>의 역사 현장을 찾아서
  • 중국 남경·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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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 삼협 댐 1단계 공사 후 일부 수몰… 전적지 답사하는 ‘유람선 관광’ 인기
영화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 하면 <패왕별희(覇王別姬)>를 떠올린다. 초나라 왕 항우가 한나라 고조 유방에게 패하고 우미인과 사별하는 애절한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정작 중국인들에게는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를 극화한 <적벽대전(赤碧大戰)>이 더 흥미롭고 박력 있다 해서 <패왕별희>보다 인기가 있는 편이다.

실상 조조의 20만 대군을 물리친 주역은 오나라 지장(智將) 주유지만, 그를 도운 촉나라 재상 제갈량을 더 높이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건 중국에서건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최고로 치는 경극 전문 극단인 북경경극원이 이원 극장에서 정기로 선보이는 <적벽대전>에서도 이 점은 분명해 보였다. 관객들은 주유보다 제갈량에게 박수갈채를 더 많이 보냈다. 그가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구해오라는 주유의 계책에 흔쾌히 응한 후 짚으로 만든 가짜 병력을 배에 태우고 위군 진영 앞에 나아가 태연히 술잔을 기울일 때나 손바닥에 불 화자를 써 위군에 대한 화공(火攻)을 제안할 때는, 관객석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오(好)!’라는 추임새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선상에서 조자룡의 창끝이 번뜩이면서 시작되는 마지막 전투 장면에 이르면 제갈량이라는‘전쟁의 신’에 대한 중국 관객들의 환호가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위·촉·오 세 나라의 패권 다툼이 있던 때로부터 1천8백여 년이 흐른 지금, 개발의 역사 앞에서는 제갈량의 불패 신화도 무력해 보이기만 한다. 진나라의 만리장성과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 이래 최대 역사(役事)라는 양자강의 삼협 댐 건설로 적벽을 포함한 <삼국지>의 주요 무대가 대부분 물 속으로 가라앉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양자강은 자연스럽게 위·촉·오 3국의 경계선을 이루어, 이곳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적지가 많다. 이 일대 유적지 일부는 올해 11월이면 삼협 댐 1단계 공사가 완공되어 수몰 위기에 처했다.

건설 계획이 처음 알려진 10여 년 전부터 삼협 댐은 국내외에 격렬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정부의 야심은 한마디로 ‘남쪽의 물을 끌어다 북쪽 지역을 바꾼다’(南水北調)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중국에서 장강(長江)으로 불리는 양자강은 중국인들에게 곡창 지대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홍수라는 재앙을 몰고 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외국에는 장강의 일부인 양자강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양쯔 강으로 불린다). 주기적인 홍수로 금세기 들어서만도 3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정도다.
“개발이 문명의 자취 지운다” 반발 거세

중국 정부의 남수북조 사업은 양자강 중류에 세계 최대 수력 발전용 댐을 건설해 전력난을 해소하고, 물 때문에 곤란을 겪어온 강북 지역에 용수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앞으로 10여 년간 외국 자본만도 총 2백60억달러(약 23조원)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사업은, 이붕 총리가 직접 관장할 정도로 비중 있는 공사다.

반면 구미의 환경론자들은 이재민만 해도 1백90만명에 이를 이 사업이 불러들일 환경 파괴에 주목해 왔다. 특히 구미인들에게는 유람선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올라가는 여행(Yangtze Cruise)이 중국 개방 후 시작되어 92년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삼협 댐 건설 사업을 이집트 문명의 일부를 앗아간 아스완 댐 건설 당시와 비슷하게 반감을 갖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성 언론인으로 <양자강! 양자강!>이라는 책을 펴내 10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던 대청(大淸) 같은 중국인 일부도 이런 반대론에 가세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대역사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세계적인 관광지 하나가 사라진다는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삼국지>를 사회 생활의 교과서처럼 여겨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대역사는 또 하나의 정신적 고향인 낯익은 지명들이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다. 양자강을 따라 거슬러오르면서 삼국 시대의 유적지들을 둘러보노라면, 본고장 중국인들보다도 더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삼국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상상했던 것보다 볼품 없고 초라한 데 대해 대개는 실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망한 만큼 상상으로라도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양자강 하류 남경(南京)에는 <삼국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오나라 왕 손권의 묘가 있다. 복숭아 밭 한가운데 덩그라니 솟은 정자 하나뿐인 이 난세 영웅의 묘는 근처에 있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나 신해혁명 주역 손문의 화려하고 거대한 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최근 들어서야 중국 정부가 관광객을 의식해 손권의 유명한 일화를 부조해 놓고 동상을 세웠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곳에 들르면,‘강산은 그림 같은데,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여기 머무르다 갔나 ’하는 소동파의 시구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게 마련이다.

물론 초기 단계인 삼협 댐 공사와 관련해 아직까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삼협 댐에 대한 반대 여론을 누그러뜨리려는 중국 정부는 이 공사에 따른 좋지 않은 결과를 가능한 한 축소해 발표하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전적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양자강을 따라가는 <삼국지> 기행의 마지막 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촉나라 수도 성도(成都)의 수몰 여부가 대표적인 예다. 유비가 짧은 기간이나마 황제로 군림했고, 숨을 거두면서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 이 도시는, 삼협 댐 공사로 수몰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중국 국립관광청은 이 역사적인 도시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립관광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유서 깊은 도시는 삼협 댐 공사로 아름다운 물안개에 둘러싸이게 되어 더욱 볼 만할 것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더 이상 이 도시 외곽의 산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랑까지 덧붙여 놓았다(<트래블차이나> 21호·97년 7월23일자).

그러나 현재 63m에 달하는 댐 수면의 해발 고도를 무려 1백10m나 끌어올리게 되므로, 댐이 완공되는 2009년에도 이들의 공언이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당장 올해 11월 1단계 공사가 완공되기만 해도 저수된 강물의 수면 고도가 18m나 높아져 인근 지형이 크게 바뀔 전망이다.

성도가 <삼국지> 기행 종착역이라면, 시발점은 사시(沙市)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곳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허구로 알려진, 제갈량이 형주(荊州) 점령을 방해하던 오나라 장수 주유의 화를 돋우어 스스로 죽게 했다는 노화탕을 볼 수 있다. 사시가 제갈량의 도시라면, 형주는 본국인 촉나라와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도 호시탐탐 이 지역을 넘보던 오나라에 굴하지 않은 관우의 충절이 서려 있는 도시다. 형주에는 지금도 높이 4∼7m, 너비 10∼14m인 성벽이 남아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이를 관우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의창(宜昌)을 지나고 강폭이 돌연 7분의 1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 양자강은 결코 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2㎞가 넘는 강폭에 쉴 새 없이 오가는 바지선과 벌크선은 이 강을 그저 누런 바다쯤으로 여기게 한다. 그러다 강폭이 갑자기 줄어드는 지점부터가 삼협 지역인데, 서릉협·무협·구당협 등 세 협곡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양자강 유람의 백미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적지인 적벽을 비롯해 삼국 시대의 일화를 간직한 절벽으로 가득차 있다. 이 지역은 1단계 공사만으로도 대부분 수몰될 것으로 보이며, 완공 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높다.

삼협 댐 건설로 위협받는 양자강 유람선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95년부터 이 지역을 운항하는 국내외 유람선 17척에 대해 호텔처럼 별로 등급 표시를 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5성급 유람선은 2척, 4성급은 9척에 이른다. 국내 관광업체를 통해서도 이 유람선들을 이용할 수 있으며, 값은 등급에 따라 차이가 크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국내 관광업체들이 내거는 선전 문구처럼, <삼국지>의 주요 무대가 올해 11월을 기해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중국 정부가 선전하는 대로 삼협 댐 공사가 완공된 10여 년 후에도 살아 남을 수는 없어서, 요즘 중국인들이 만만디 대신 애용하는 표현대로 <삼국지> 기행을 서두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콰이콰이(快快·빨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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