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담론’ 왜 거듭 부활하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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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현실 반영하며 평가 달라져…영웅적 비장미, 정치인·대중에게 인기
국회에서 탄핵 소추된 노무현 대통령이 김 훈씨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다시 꺼내 읽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부터다. 정치권 주변에 때아닌 독서 붐이 일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면 ‘노심(盧心)’의 행간을 엿볼 수 있다는 해석이 잇달았다.

사실 이순신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서술된 <칼의 노래>는 그럴 여지를 다분히 남긴 소설이다. 작가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 상상의 영역을 최대 한도로 확대하여 김 훈이 이순신이 되기도 하고 이순신이 김 훈이 되기도 하는 공간을 마련’(문학 평론가 김인환)함으로써 21세기에 살아있는 소설가(혹은 독자)와 16세기에 죽은 ‘민족의 사표’가 수시로 동화되도록 했다.

“그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변호사 시절이던 2001년 8월 <대한변협신문> 34호에 기고했던 <칼의 노래> 독후감 중 일부다. 이 글이 강장관의 요즘 심경을 대변하는 글로 새삼 발굴되어 회자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노대통령과 강장관의 사례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칼의 노래>의 특별한 서술 구조 때문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가 주는 매력이 더 큰 것이다. 이순신 담론은 기실 정치권 인사들이 오래 전부터 애용해온 소재였다. 최근에는 특히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 아직 제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고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라는 장계 내용이 단골 메뉴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았다고 했던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3월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누란 위기에서 배 12척을 가지고 수십만 왜군을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처럼 민주당을 일으켜 세우겠다.”(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 3월30일 임진각 선대위 발대식에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처럼 사즉생의 각오로 임하겠다.”(조순형 민주당 대표, 1월19일 대구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상유십이 순신불사’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다.”(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002년 4월28일 당내 경선에서 ‘노풍’으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질문에 대해)

“충무공이 배 12척으로 왜선 1백30여척을 물리쳤듯 자민련을 지켜나가겠다.”(김종필 자민련 총재, 2002년 대선 직전 연쇄 탈당으로 소속 의원이 12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순신은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원한 영웅이다. 장수로서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는 점도 훌륭하지만 ‘멸사봉공·유비무환·백의종군’ 같은 진선미적 가치를 구현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함이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듯 사후의 평가 또한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조선조에서 이순신이 온전히 평가받은 것은 18세기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다. 정조는 교서관 유득공에게 명해 원집 8권과 부록 6권으로 된 <이충무공전서>를 펴냈고,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했다.

이후 다시 잊혀가던 이순신은 20세기 초에 다시 부활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순신 담론은 ‘당대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적 시각으로 이순신의 잠을 깨운 첫 번째 인물은 단재 신채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단재는 대한매일신보(1908년 5월20일~8월18일)에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단재에게 충무공은 장졸과 백성의 힘을 모아 국난을 극복한 영웅이자 민족 자강과 통합의 기제였다. 이는 <을지문덕전> 등 당시의 민족 영웅 서사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태도이기도 하다(신형기 연세대 교수).

춘원 이광수도 훼절하기 전인 1930년대 초 동아일보에 <이순신>을 연재했다. 춘원은 당파 싸움에 초연한 영웅과 당파 싸움에 미친 조선 지배층의 갈등을 소설의 주요 뼈대로 삼았다. 춘원 역시 자신이 주창하던 민족개조론의 텍스트로 이순신을 원용했던 셈이다.

그리고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이순신 담론은 본격적으로 기획되고 완성되었다. 현충사 성역화와 전국적인 동상 건립이 이때 이루어졌다. 노산 이은상이 <성웅 이순신>을 쓴 것도 이 때다. 지금 30~40대가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본 ‘말에서 떨어진 이순신’ 이야기의 출전이 이 책이다. 민족문화협회 부설 횃불사가 출판한 이 책은 홍종철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의 독려 속에 준국가사업 성격을 띠고 배급되었다.

박정희의 이순신관은, 박정희의 요청으로 1975년 5월21일부터 만 1년 동안 주 2회씩 국무회의 석상에서 장관과 장성 들을 모아놓고 특강했던 역사학자 이선근씨가 자신의 특강 내용을 묶어 펴낸 <한민족 국난극복사>에 잘 나와 있다. 박정희에게 국사란 곧 국난극복사와 다름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자신과 유신 체제 또한 그런 선상에서 해석되어야 했다. 그 상징 모델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물론 박정희가 이순신을 띄운 또 다른 배경으로 ‘일본군 콤플렉스’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소설가 송우혜). 이승만 시절에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던 독립운동가 발굴과 포상이 박정희 시대에 와서야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순신을 통해 당대의 해법을 구하려 하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서 김태진의 소설 <이순신 장군>이 나온 때가 1948년. 남북 모두 단일 정부를 세운 직후다. 이때부터 북한 당국은 냉전 체제에 걸맞는 이데올로기 학습에 치중했는데, 그 방향이 애국주의와 국제주의였다. 그리고 ‘국제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었다면, 애국주의란 외세에 반대하는 민족주의를 선무·함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문학 평론가 김재용). <이순신 장군>과 전무길의 <을지문덕 장군> 등이 이 과정에서 쓰였다.

이순신 담론은 1980년대 이후, 박정희의 사망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때부터 화석화한 계몽적 영웅은 고적한 마음의 행로를 가진 한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현재. 이순신은 김탁환의 장편소설 <불멸>, 김 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 김영하의 단편소설 <보물선>(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에 수록) 등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순신은 ‘원 균이라는 라이벌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인간’(<불멸>)이기도 하며, ‘백성을 사랑하지만 베어야 할 때 서슴지 않고, 일자진과 학익진의 전환을 끈질기게 훈련하여 허를 실로 바꾸는 인물’(<칼의 노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은 ‘왜군의 칼날과 조정의 칼날에 맞서 자기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절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인간’(김인환의 <칼의 노래> 비평)이다.

김영하 소설에는 이순신이 아닌 세종로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등 친일파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 부분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으로 바꾸어 새겼다고 믿고 동상을 폭파한다. 하지만 충무공 동상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원형이 다시 복원된다. 결국 이 소설은 ‘절대적 이데올로기의 허무함을 비판하면서, 그런 광적인 열정이 언제든지 현실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문학 평론가 고영직)

이순신 이야기가 끊임없이 변주되고 대중에게 호소력을 얻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만큼 한국사에서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많이 갖춘 인물도 드물다. 그는 단순한 국난 극복의 애국자가 아니라 고귀한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웅이다.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메타포가 ‘쿨’한 삶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에까지 먹혀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정치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강금실 장관에게 이순신은 ‘꽃 같은 정열, 단순함, 순결성’의 상징이다. ‘적 앞에서 12척의 초라한 함대를 이끌며 일궈낸 기적 같은 승리는, 기꺼이 삶을 버림으로써 죽음과 삶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경계에 이르러서 가능했다’는 독후감에서 강장관의 생각이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하다”라는 말 외에 별다른 소감을 밝힌 적이 없어 그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강장관과 비슷하리라고 유추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박근혜·추미애 의원 등 다른 정치인들의 속내는 더 분명하다. 배 12척을 이끌고 전선에 나섰던 구국의 영웅에게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극적 영웅을 자기화하는 것은 자신을 계백으로 자처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개혁 공천이 좌절한 뒤 추미애 의원은 계백의 심경이라고 토로했다.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도 ‘민주당을 지키는 계백이 되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장렬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또한 이순신에게 배운 것이다. 사즉생! 이순신이 자살을 유도했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떠도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순신이 구현했던 ‘멸사봉공·유비무환·백의종군’이 당대의 진선미적 가치였던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현재의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이순신을 차용하는 사이에 16세기 무인의 멘털리티가 어느덧 우리 정치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여야는 서로 무찔러야 할 적이며, 정치는 사즉생의 자세로 임해야 할 무엇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대다수가 <삼국지>를 읽고 정치가의 상당수가 이순신의 서사에 매료되는 시대가 과연 근대일까?”라는 소설가 김영하의 자문은 적지 않은 울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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