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세계 문화 엑스포]볼거리 풍성, 문화 창출 빈약
  • 경주·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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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프로그램, 일관성·연관성 없어… 방만한 예산·관 주도 등 문제 많아
“한국은 참 부자인가 봐요.” 경주 세계문화 엑스포에 참석한 한 외국 무용수의 소감이다. 행사장 근처 호텔에 묵고 있다는 그는, 이렇게 많은 공연단을 초청해 극진히 대접하는 한국의 재력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9월11일 막이 오른 경주 세계 문화 엑스포(경주 엑스포:조직위원장 이의근 경북도지사)는 언뜻 보기에도 풍성하고 번듯하다. 예매 1백10만표. 개막 첫날 입장객 5만명. 마흔 여덟 나라가 마련한 수백 가지 공연과 전시 행사. 15만평에 이르는 행사장은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양한 레퍼토리는 볼거리를 찾아 나선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세계 6대 문명의 시원(始原)을 보여준다는 세계 문명전, 백남준의 <백팔 번뇌>를 비롯한 기기 묘묘한 비디오 아트 작품들, 세계 각국 공예품과 음식을 접할 수 있는 풍물 광장. 레이저 빔이 날고 비누 거품이 퐁퐁 쏟아지는가 하면, 거대한 스크린을 배경으로 승무가 어우러지는 입체 공연도 관람객의 혼을 빼놓았다. 관객들은 뙤약볕도 잊은 채 ‘별의별 게 다 있는’ 행사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대전 엑스포를 방불케 하는 열기. 그러나 문제는 행사의 성격이 엄연히 다른데도 대전 엑스포를 찾았던 이들과 경주 엑스포를 찾는 관람객의 기대치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사장 풍경도 비슷했다. 길게 늘어선 줄이며 도시락을 싸들고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 쫓기듯 허겁지겁 행사장을 순례하는 관람객들.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측이나 관람객 모두에게 엑스포란 다양한 볼거리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 듯했다.

경주 엑스포 조직위가 밝히는 취지대로라면 이 행사의 의미는 꽤나 거창하다. ‘세계의 모든 문화를 한자리에 모아 새로운 문화 창출을 꾀하면서 문화·상품·관광·개발을 하나로 연계해 경주를 세계 문화의 수도로 만들어 간다.’ 단순한 볼거리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명의 시원을 더듬고 세계 문화를 한자리에 모으다 보니 씀씀이도 커진 것일까? 행사 예산은 4백4억원이나 된다. 그 가운데 국고 지원 1백50억원을 비롯해 세금으로 충당하는 비용이 예산의 80%인 3백4억원에 이른다(경제 위기 이후 많은 행사의 예산이 삭감되는 와중에서도 유독 경주 엑스포는 정부의 특별 지원금 30억원을 받아냈다).
외국인 관람객 고작 만명, 내국인 잔치 될 듯

더구나 조직위는 행사를 2년마다 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0년에는 아시아·태평양 정상회의가 있고, 2002년에는 월드컵이 열리니 그 행사와 연계해 국제 규모의 문화 행사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발표된 <경주 문화 엑스포의 경제적 효과>라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는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다. 영남대 이성근 교수가 내놓은 이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인 12만명을 포함해 관람객이 3백만명을 넘어설 경우 생산 유발 효과는 2천35억원에 이르며 2만4천43명의 고용을 창출하게 된다. 하지만 경주 엑스포가 내국인 행사에 그칠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세계 문화의 메카는 고사하고 돈 벌자고 벌인 좌판이 빚더미를 안기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이같은 우려는 기우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내국인들의 호응은 의외로 높지만 외국인들의 관심은 극히 저조하다. 8월 말까지 참관 의사를 밝혀 온 외국인은 만여 명. 외국 관람객이 12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조직위 목표에 크게 못미친다. 준비 과정에서도 과연 외국인을 염두에 두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

5만이 넘는 인파가 몰린 전야제 행사장.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영어 자막 하나 없고 무엇에 쓰려는지 한글 자막이 띄워져 있었다. 행사장에 마련된 전시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뒤에 몇 줄 적어 놓은 영자 해설이 구색을 맞추고 있을 뿐 일본·중국 등 아시아권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조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치고 너무 예산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일관성과 연관성을 찾기 힘든 잡다한 프로그램이다. 경주 엑스포는 준비 단계부터 경주의 문화적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라는 주장과 또 하나의 놀이터로 만들 뿐이라는 비판이 엇갈렸다. 7천여 명이 참여하는 7개 분야의 프로그램은 경주 엑스포가 내건 ‘새 천년의 미소’라는 주제 아래 가까스로 묶여 있을 뿐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규모에 비해 준비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데서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구상이 처음 나온 것은 96년 3월.‘문화 도지사’를 자임한 이의근 경북도지사가 주도해 96년 12월 재단법인 경주문화엑스포가 만들어졌고 97년 11월 행사 실행 계획이 확정되었다.

자문위원 40명·조직위원 1백7명 ‘거대 조직’

경주 엑스포가 행정력에 기대어 급조된 행사라는 혐의에 무게를 더하는 것은 턱없이 방만한 조직 구성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비롯한 자문위원이 40명,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 인력 외에도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조직위원이 1백7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전 문화부·외무부 장관, 전 안기부장 식으로 전직 관료들의 이름이 잔뜩 올라 있다. 조직과는 별개인 자문위원과 조직위원을 겸하는 명망가들도 눈에 띈다.

이렇게 되자 성공적인 행사를 빌어 주던 지방 언론들조차 행사가 지나치게 관 주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를 나타낸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역 행사의 조직위원장을 맡는 것은 관례로 보아 넘길 수 있지만, 기획과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총장까지 관료가 맡는 것은 자율적인 기획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몸피를 늘려 놓고 보자는 경향이, 눈에 보이는 실적을 추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속성에 말미암은 부분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문화 축전이 제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가 상호 보완적으로 운영되는 외국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해외에서 예를 찾지 않더라도 전문성 있는 기획 덕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부산 국제영화제가 좋은 전범이 될 법하다.

경주 엑스포는 급히 준비한 행사치고는 볼거리가 풍성한 편이다. 남은 과제는 국제적인 문화 축전으로서 자생력을 갖추는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해도 언제까지 혈세(血稅)를 일개 지역 문화 행사에 쏟아부을 수는 없다. 승부는 돈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기획이다. 천년 고도 경주의 찬란한 문화에 젖줄을 대고 차근차근 내실을 다져 가는 모습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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