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기쁨 함께 주는 이색 벼룩시장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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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품과 인정 함께 사고 파는 벼룩시장 ‘활짝’
외국에서 생활해본 이들은 대부분 벼룩시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기절할 정도로 물건 값이 싼 것도 즐겁지만, 자신의 물건에 새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즐기는 외국인의 정서도 적지 않은 문화 충격을 준다. 심지어 아이들도 쓰던 장난감을 집 앞에서 팔고는 한다.

반면 한국은 남이 쓰던 물건에 좀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벼룩 시장 하면 골동품 전문 시장이 떠오를 뿐 생활 중고품은 기부를 통해 유통되는 것이 고작이다. 기부는 ‘훌륭한 일’이기는 하지만, 물건을 사고 파는 데서 오는 은밀한 즐거움이 빠져 있다. 쓰던 물건이 새 생명을 얻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를 보통 사람도 느껴볼 수 없을까?

현대백화점 그린마켓-친환경 벼룩시장

시장이 열리기 전인데도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윽고 11시.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한다. ‘아줌마 부대’가 돌진해 들어간 곳은 건물 옥상 하늘공원에 마련된 천막 안이다. 남보다 빨리 물건을 선점하려는 욕심에서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진 것이다. 서울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이 2주에 한 번꼴로 마련하는 ‘그린마켓’ 풍경이다. 천막 바깥에서는 우아한 첼로 연주가 울려 퍼지고, 피에로가 아이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장이 선 지 1시간이 지나자 파장 분위기가 감돈다. 12시 무렵,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한 주부는 실망한 낯빛이다. 그린마켓 담당자인 최정규 대리는 “이미 70% 이상이 팔려나갔다. 다음에는 조금 빨리 오시라”며 미안해한다.

이 시장의 컨셉트는 이름 그대로 친환경이다. 중고 물건을 돌려씀으로써 자원을 재활용하고, 유기농 채소와 화분 등을 사고 파는 친환경적인 시장으로 거듭나겠다는 의도이다. 하지만 이 곳은 강남에 있기 때문인지 명품을 값싸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안나의 바자’ 팀을 섭외한 것이 주효했다. 상당수가 중고 명품이고, 명품이 아니더라도 감각 있고 쓸 만한 물건이 많다는 입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안나’ 한영아씨에 따르면 첫회부터 사람이 너무 몰려 ‘30분 이상 쇼핑하신 분은 나가달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상자 기사 참조).

물건을 내놓고 싶은 사람은 그린마켓측에 기증하거나 위탁 판매를 신청하면 된다. 물건에 주인 이름을 붙이고, 주인이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팔아준다. 매주 둘째·넷째 일요일 11시부터 3시까지. 문의 02-3449-5834
지난 4월부터 서울시가 지원하는 어린이 벼룩시장에 대한 호응이 뜨겁다. 프로그램 이름은 ‘친구야 바꿔 놀자.’ 이 행사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쓰던 장난감을 가져오도록 한 뒤 쿠폰을 지급하고, 그 쿠폰으로 맘에 드는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한다. 물건의 소중함도 알게 하고, 구매 행위에 대해서도 일러주는 일거양득의 교육 효과를 노린 것이다. 지난 4월 이후 매달 유아원생 1만여 명이 이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 5월 말 은평구가 마련한 행사장. 유아원생 수백 명이 몰려와 웅성댄다. 한 손에 장난감을 움켜쥐고서도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장난감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쿠폰으로 2개 더 고를 수 있겠네. 골라 봐.” 선생님 말이 떨어지자 꼬마들은 횡재라도 한 듯 인형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오전 11시에 장이 열렸지만, 30분 남짓 지나자 물건이 동이 났다. 남이 쓰던 물건이어서 꺼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어른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이시정 응암구립어린이집 원장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물건을 풀려고 했는데, 벌써 동이 나버렸다”라며 즐거워했다.

은평구청 박현청 계장은 다음 달부터는 일반인에게도 시장을 개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린이 벼룩시장은 매월 말 서울시 전역에서 열린다. 서울시 홈페이지나 구청 홈페이지의 공고 참조. 문의 서울시 보육지원과 02-3707-9851.
홍대앞은 중고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은 아니지만, 벼룩시장의 재미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자기가 만든 물건을 직접 파는 ‘프리 마켓’이기 때문이다. 홍대앞 놀이터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점심 무렵이 되면 매대로 빼곡히 채워진다. 장사 준비는 야외용 사각 테이블을 펼치는 것으로 끝이다. 파라솔도 없어, 주인들은 양산으로 따가운 햇볕을 가린다.

파는 물건은 가방, 액세서리, 수첩, 인형과 옷. 모두 직접 만들어야 프리마켓 안에 매대를 차릴 수 있다. 매대에서 계속 바느질을 하며 작품을 만드는 주인도 적지 않다. 몰려든 손님들은 기기묘묘한 물건을 보며 킥킥댄다.

현재 프리마켓 사무국에서 자격을 인정받은 아마추어 예술가는 1백20여 명. 하지만 행사장에는 그보다 매대가 적었다. 춘천에서 열리는 국제마임축제에 초대받아 일부가 ‘출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무국 대표 김영등씨에 따르면, 서울의 백화점이나 영화제, 연극제 등에서 초청받는 경우가 잦다. 백화점 등 영리를 꾀하는 곳의 요청은 대부분 거절하고 문화 행사에 적극 참여한다. 형편이 괜찮은 곳은 차량과 숙소를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곳도 교통편은 제공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토인 마포구에서는 그다지 환영받는 처지가 아니다. 구청은 매주 법적인 근거 없이 놀이터를 점령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다른 곳에서는 부르지 못해 안달인데, 정작 마포구는 이 시장이 얼마나 큰 자산인 줄 모른다”라며 답답해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홍대앞 놀이터. 신청은 프리마켓 사무국(www. freemarket.or.kr)으로 하면 된다. 문의 02-325-8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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