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워하는 비틀린 민족주의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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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셀러 통해 ‘반일·극일’ 정서 젊은층에 확산
일본은 있는가, 없는가. 일본을 겨냥한 새로운 ‘민족주의’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지난해 한국 출판계를 강타한 ‘민족주의 열풍’이 올해에도 장르를 넓혀가며 번지는 것이다.

3백만부 이상이 팔려 한국 출판 사상 최대의 베스트 셀러라고 자랑하는 김진명의 장편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서출판 해냄)는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5월20일 개봉되고, 93년 7월부터 한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면서 인기를 모은 이현세 만화 <남벌(南伐)>(팀매니아)은 지난 3월 초 마지막 단행본(9권)을 내고 곧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남벌>의 ‘글’을 담당한 야설록씨에 따르면, <남벌>은 4월 말 현재 권당 10만부씩 90만부가 팔렸다. 소설과 달리 만화는 독자들이 대본소에서 빌려 읽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궁화꽃…>보다 더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통쾌한 대리 만족감의 이면

KBS 도쿄 특파원을 지낸 전여옥씨가 펴낸 <일본은 없다>(지식공작소)도 지난해부터 수많은 독자들을 만나 왔다. 소설가 고원정씨는 <대한제국 일본침략사>(현암사)라는 가상 역사 소설을 달마다 한 권씩 내놓았고, 스무 살 의대생 윤종석씨는 지난 1월 <파이어 데이>(소학사)라는 장편 전쟁 소설을 내놓았다.

이 책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우선 소재가 모두 한·일 관계이고, 그 초점이 이른바 ‘일본 죽이기’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일본은 없다>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가상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무궁화꽃…>은 말미에서 일본과 핵전쟁을 벌이고, <남벌> <대한제국…>은 ‘침략’ 또는 ‘전쟁’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책들에 의하면 ‘일본은 없거나, 곧 없어져야 할’ 대상이다.
세 번째 공통점은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으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책이 전형적인 무협지 구조에다 권선징악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지난 3월 초 한국도서신문사가 서울대 24개 학과 신입생 2백1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무궁화꽃…>과 <남벌>이 <태백산맥>(9.6%)·<소설 삼국지>(6%) 등에 이어 각각 3위(5%)와 5위(3.2%)에 올랐다.

연세대 교양과목 ‘남북관계론’에서는 <무궁화꽃…>과 <남벌>이 소설 <태백산맥> <광장>,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더불어 토론 텍스트로 채택되었다.

‘남북관계론’ 강의를 맡고 있는 황종성씨(연세대 강사·정치학)는 “작년 1학기 때 ‘한반도 통일 방안’이라는 과목에서 ‘<무궁화꽃…>을 비판적으로 논평하라’는 리포트를 과제로 내준 적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정제되지 않고 허술한 부분도 많아 비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학생들이 그 논리와 전망에 매료되어 있었다. <남벌>은 텍스트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학생들이 만화라는 형식에 호감을 갖고 있어 채택했다”고 말했다.

<남벌>은 특히 만화에 대한 편견이 없는 젊은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해 5월 컴퓨터 통신 하이텔을 통해 <남벌> 토론이 한달간 뜨겁게 전개되었는데, 이때는 단행본 아홉 권 가운데 겨우 세 권이 나온 시점이었다. 서울대 농경제학과 4년 김영호군은 “다음 권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만화방에서 줄을 서서 보았다. 적어도 대학생 10명 중 7명은 이 만화를 보았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일본을 밟아 본 적이 없으니 상상으로나마 밟아보자’는 심리와, 또 ‘통쾌한 민족주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다른 동남아 국가와 전쟁을 했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젊은층이 열광하는 이 ‘민족주의’가 과연 바람직한 민족주의일까.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아래 박스 기사 참조)과 맥을 같이하는 것일까.
노경채 교수(수원대·사학)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경제 성장 과정에서도 일본은 늘 우리의 준거가 되었다. 이런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을 민족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쇼비니즘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문학 평론가 이성욱씨(<문화과학> 편집위원)는 이같은 경향을 ‘의사(擬似) 민족주의’로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우선 ‘우리도 이만큼 컸다’는, 근거가 희박한 거품 같은 자신감에서 ‘의사 민족주의 열풍’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피해 의식과, 그 피해 의식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 받으려는 데서 이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공허감 남기는 민족 컴플렉스

이씨는 또 이런 경향을 90년대 세계 질서와 연결한다. 이씨에 따르면,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보편성의 논리가 강요되고 있는바, 전통적 의미의 국경이 무너지면서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따라가는 상황에 놓이는 한편으로 생존 및 자존을 위한 민족간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경향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강박관념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강요된 보편성의 원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타깃이 필요하다. 북한에 대한 정서가 ‘적’에서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뀌자 일본이 새로운 타깃으로 등장한 것이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나는 우리의 피해 의식을 극복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작업의 일환인 가상 전쟁 시나리오 속에서 상대국을 서슴없이 일본으로 설정했다.’ 이현세씨가 <남벌>의 ‘작가의 변’에서 한 말이다. 글을 쓴 야설록씨는 “전쟁이라는 소재를 개인적으로 좋아했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했다.

<남벌>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다양하다. 평소 만화를 전혀 보지 않다가 ‘그 유명한’ <남벌>을 보게 되었다는 한 대학생은 “문제는 많다고 여겼으나, 무엇보다 속이 후련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남벌>을 본 친구들 사이에서 ‘일본과 전쟁하면 이길 것 같던데’라는 말도 돌았다”고 전했다. 이와는 반대로 지난해 10월 <성대신문>에 기고한 대학원생 최공호씨(독문학과 석사과정)는 “이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공허하다 못해 허전한 민족적 콤플렉스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간다.”고 독후감을 밝혔다.

‘핵 폭탄 공습 경보가 발효된 일본 전역에서는 사상 초유의 대혼란이 일어났다. 공습 경보는 전국을 아수라장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남북한 지도자가 합의해 한반도를 공격해 온 일본에 핵폭탄을 발사하자 일본에서 일어난 참상을 묘사한 <무궁화꽃…>의 마지막 대목이다.
황종성씨(연세대 강사)에 따르면, 학생들은 리포트에서 ‘한국이 핵을 가져야 한다’는 점과 ‘남북한이 일본 앞에서 무조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 동감을 표시했다. 황씨는 “통일은 공생과 상생의 기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이 있으니 내부를 결속하자는 식의 논리는 바른 민족주의도 아닐 뿐더러 남북 관계의 발전적인 진로도 아니다. 게다가 <무궁화꽃…>은 핵무기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자 호도하는 핵 예찬은 위험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니는 홍성태씨(사회학)는 “<무궁화꽃…>은 핵을 보유하면 자주 국가가 되는 것인 양 독자를 호도하고 있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일본과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데서부터 문제를 따져야 했다. 일본과 군비 확장 경쟁이 불가능한 현 시점에서 김진명씨의 찬핵론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라고 지적했다. 홍씨는 또 “휴전이라는, 전쟁 지연 상태에 있는 지금 우리는 전쟁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무궁화꽃…>은 독자로 하여금 전쟁을 당연시하게 하고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고원정씨의 소설은 아예 제목부터 ‘대한제국일본 침략사’이다. 이 소설 역시 작가가 보기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던 지난 ‘백년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엮어나가는 가상 역사’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정된 마흔여덟 권 가운데 열 권이 나와 있는 지금 소설의 시간은 조선 철종 연간에 머물러 있다. 고씨는 “해묵은 역사에 대한 분풀이로써가 아니라 새롭게 전개될 역사의 교훈을 캐내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용하 교수(서울대·사회학)는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변국에 여러 모로 해를 입히고 있는 지금 이에 대한 경각심이나 반발이 솟아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런 반발을 일본을 깊이 알고 스스로 분발하는 건설적인 작업의 한 측면으로 활용하지 않고 대리 만족으로 무산시키는 것은 결코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일본이다

최근 ‘한·중·일의 문명사적 담론’을 담은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라는 저작을 펴낸 원로 예술평론가 박용구씨도 “우리의 역사는 강대할 때도 타민족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남벌> 같은 발상은 참으로 위험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양 저울의 기둥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면서 지혜롭게 공존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일본을 알려는 노력도 없이 ‘일본은 없다’고 겉핥기로 규정한 것은 상업성에 놀아난 꼴밖에 안된다. 일본학은커녕 일본 문학도 제대로 소개가 안된 형편에서 이런 책들은 왜곡된 일본상만 심고 있다”고 말했다.

광복 50주년의 슬로건들은 거의 모두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본은 아직도 이중적이다. ‘불가해한 수수께끼의 나라’인가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닮아야 할 모델로도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대한 감정과 이성 사이의 골은 크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있다, 혹은 없다의 대상이 아니다.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의사 민족주의 열풍’은 우리 자신과 일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의사 민족주의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민족주의는 어느 학자의 표현대로 ‘이불 속에서 큰 소리 지르기’와 같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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