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국립경주박물관장 사임하는 강우방씨
  • 경주·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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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관료 조직으로 변질되고 있다"
한국 미술사학의 권위자 강우방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오는 8월 말 자리를 물러난다. 1968년 학예연구사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첫발을 디딘 지 32년 만이다. 그것도 정년을 겨우 1년 앞두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어서, 사임 배경이 문화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강관장은 새 학기부터 이화여대 교수로 강단에 선다. 이임을 앞둔 강관장이 마음을 비우고 들려주는 목소리는, 한국 문화계에 던지는 죽비처럼 따끔했다.

그의 소신은 박물관을 한국 문화 연구의 중심에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모아둔 곳이 바로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귀중한 문화재를 단순히 보존하기만 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죄라고 여긴다. “좋은 전시를 기획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매년 두세 편씩 논문을 발표해 왔으니, 직분에 충실했다고 자부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운을 잘 만났다고 말했다. 국립박물관 근무 시절, 미술사학계의 큰 별 최순우 선생 문하에 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씨가 길을 터 주어 공무원 신분으로 일본 교토 박물관과 하버드 대학 등에 5년 넘게 유학했고, 그 덕에 ‘공부하는 박물관장’으로 순탄한 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나름으로 솔선했는데도 대세는 반대로 흘러 뜻을 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고별사’는 관료주의화에 강조점을 찍고 있다. 강관장은 “박물관은 학예연구사들이 나름의 역할을 다해야 전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학구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점점 행정 관료 조직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비단 박물관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오늘의 한국 문화를 ‘총체적 황폐화’ 상태라고 파악하고 있다. 문화 정책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의 모든 힘이 정치와 경제에 쏠리다 보니 문화는 정신적인 ‘장식(裝飾)’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할 전문가 집단조차 시류에 영합해, 학문을 부(富)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말했다. “지식인은 있되 지성인은 없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비전문가가 박물관장 심사하는 것은 희극”

그의 사임 시점은 미묘해 보인다. 경부고속전철·경마장 건설 등 경주권 훼손이 불가피한 대형 국책 사업을 앞두고 그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고, 마침 그가 이임하는 다음날 경주 문화 엑스포가 개막된다. 주변에서는 그의 사임이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과정에서 불거진 고고·미술사학계 내부 알력설, 불합리한 인사에 대한 불만설 등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갖가지 추측을 낳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 국립중앙박물관장 공모에 응했다가 탈락했다. 경력과 학문적 성과 등에서 유력한 후보로 평가되던 그가 낙선한 것은, 작지 않은 파장을 불렀다. 이것이 자진 사임의 배경이 아니냐고 묻자 강관장은 말을 아꼈다. 남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관장은 “이 말만 하겠다”라며 입을 열었다.

“심사진이 불합리하게 구성된 점만은 분명하다. 심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언론의 지적을 받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심사한다는 건 희극이다. 공개 임용 제도가 전문가를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정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오히려 임명제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강관장은 “심사진 구성부터 공정해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해 이번 사임에 당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작용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최근 교수직 제의가 와서 받아들인 것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결정 때부터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라고 밝혔다. 그는 종전 규모의 4배 반에 달하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덩지만 크고 머리는 빈 박물관이 될 것을 우려했다. 전문가 의견을 외면한 채 옛 중앙청을 철거한 것이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한 악수(惡手)였다고 덧붙였다.

안일과 침묵이 지식인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하는 강관장은 “학자로서 학문할 곳을 찾아가는 것 뿐이니 더 이상의 해석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새 학기부터 강단에 서는 그를 두고 문화계 인사들은, 학계의 수확이자 문화재 현장의 큰 손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는 8월28일, 마지막 기획 작품이 될 ‘신라 기와 특별전’을 개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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