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허수경 지음 장편소설 <모래도시>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6.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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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지음 장편소설 <모래도시>/독일 체험 살려 한국 소설의 공간 확장
94년 독일로 유학가 근동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시인 허수경씨(31)가 독일에서 쓴 첫 장편소설 <모래도시>(문학동네)를 펴냈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그의 시편들이 그러했듯이, 그의 첫 소설은 낙원(고향)으로부터 추방된 상처 받은 젊은 영혼들이 순례하는 내용이다.

고향과 가족을 떠난 세 대학생들의 만남과 회상, 그리고 다시 길떠나기가 <모래도시>의 줄거리를 이룬다. 그들은 유랑하는 무리이므로 늘 회상하거나 먼 곳을 꿈꾼다. 그들의 돌아보기나 내다보기는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 한다. 회상하는 주체와 회상되는 대상 사이가 현실적 공간 앞에서 안타깝다면, 그들의 꿈은 시간적 한계 앞에서 좌절을 겪곤 한다.

서울에서 독일로 유학한 ‘나’는 고향 진주와 모래 도시인 서울을 회상하는 동시에 고대 바빌론어를 해독하며 6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독일인이면서 독일인 같지 않은 슈테판은 유년기의 ‘스승’과 천체 망원경으로 회상과 꿈을 채운다. 내전 중인 레바논을 떠나온 파델은 두고온 가족의 안녕을 염려하면서 기원 전 사람들이 동경했던 이상향 ‘딜문’을 꿈꾼다.

이 유랑의 무리가 머무르는 곳은 어디든 모래 도시로 변한다. 파델의 애인 클라우디아의 아버지가 정신 이상이 되어 딸 클라우디아를 애인으로 삼으려 하자, 딸은 자살하고 만다. 애인을 잃은 파델과 슈테판은 그 아버지를 ‘처치’하고 다시 유랑길에 오른다. 회상하거나 꿈꾸는 존재들에게 현재는 늘 불모지이거나 부재하는 그 무엇이다.

<모래도시>의 소설적 성취는 우선 그 형식의 새로움이다. 세 등장 인물이 저마다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입체적 시점을 도입해 각 인물의 내면 풍경을 다각도에서 ‘촬영’한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환형적 서사 구조를 가진 <모래도시>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모래 시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작가는 “기승전결이 남성적 구조라면 둥글게 오무려지는 구조는 여성적 구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현재를 불모·부재로 인식하고 유랑하는 삶은 얼핏 허무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고대 쐐기꼴 문자와, 이상향 딜문, 천체 망원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제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고뇌와 동경으로 모아진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원한 새로운 문장, 그것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문장이었다’라고.

<모래도시>는 텍스트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현재 파리에 거주하면서 국내에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고종석씨, 지난해 파리로 건너간 장정일씨 등과 함께 한국 소설 공간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작가들이 한시적인 여행을 통해 소설 공간을 넓히는 데 견주어 이들은 서양 문화 속에서 그것들과 직접 부딪친 체험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며 한국 소설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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