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되살리는 예술의 ‘산 역사’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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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예술인 32명 증언 채록 사업 완료
“이게 완전히 인간학입니다. 구술 채록 작업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만난 원로 예술인 자서전을 써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로 예술인들의 육성을 기록하는 작업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털어놓는 소감이다.

지난 6월19일 서울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서는 ‘한국 근현대예술사 증언 채록 사업’ 1차 연도 성과를 결산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기영)이 예산을 지원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연구소(소장 강태희)가 진행한 3년짜리 프로젝트이다. 예상 예산은 10억원.

원로 예술인 100인의 구술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현재 채록이 완료된 구술자는 총 32명이다. 정진숙 을유문화사 사장(92), 국악인 이은관(87), 미술사학자 황수영(88)·진홍섭(88), 연극배우 김동원(88), 무속인 김석출(82) 등 각 분야 원로들이 망라되어 있다. 구술자 1인당 2시간씩 총 5~6회 진행되었고, 총 3백 시간의 영상 자료와 2백자 원고지 4만5천장 분량의 녹취록이 만들어졌다.

자료는 한국문예진흥원 아카이브에 보관된다. 단순한 회고담이 아니라 영상 녹화까지 겸함으로써 활용도가 더욱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는 일제 시대 변사 연기의 실제를 보여주고, 춤꾼은 춤사위를 실연해 보여 시청각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채록 작업은 구술사(oral history) 방법론을 예술사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어서 더욱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구술 연구는, 일제 강점기 연행 실태, 4·3 사건과 노근리 사건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는 데 위력을 발휘했다. 채록 작업은 문헌 연구를 보완하거나, 그 자체가 독자성을 띤 방법론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분야이다.

그와 같은 관심 때문인지 이번 채록 사업에는, 각계의 내로라 하는 중견 연구자들이 참여해 관심을 끌었다. 아예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재직 연구원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 해당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를 섭외해 폭을 넓혔다. 구술 채록 방법론을 지도한 한국정신문화원 정혜경 연구원은 “다른 곳에서는 대학원생이나 하는 막일 정도로 폄하하기 쉬운 채록 작업에 이렇듯 중량감 있는 연구자들이 달려든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37명을 교섭해 작업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지병이 심해지거나 사망하는 바람에 실제 채록은 32명에 머물렀다. 구상 시인, 영화배우 독고성씨, 한만년 일조각 대표 등은 교섭이 끝난 상태였으나 채록 전에 별세해 아쉬움을 남겼다. 아동문학가인 어효선 선생은 마지막 면담을 끝낸 뒤 한달 만에 세상을 떴다.

구술에 응한 32명은, 대부분 85세 이상 예술인들이다. 사업 초기 구술 대상자를 대표 원로로 할 것이냐 주류의 흐름을 보완하는 인물로 선정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를 벌였으나, 이와 같은 고민은 ‘쏜살같은 세월’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누구든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분들부터, 즉 고령자부터 구술을 받아 가자고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미 검증된 각계 대표 원로와, 자료가 충분치 않은 원로들이 자연스레 섞일 수 있었다. 연구자들의 고백에 따르면, 검증된 대표 원로를 만나는 일은 나름으로 편했지만, 연구자들을 들뜨게 만든 것은 주류가 보듬지 못했던 원로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문인 가운데서도 대표 원로로 보기는 어려운 좌파 시인 이기형씨가 그 예다.

이기형 시인을 만난 채록 연구자 김성수 교수(성균관대)는 “상피(相避)원칙에 따라 일면식도 없는 구술자를 연구하는 일은 지난했지만 보람이 컸다”라고 고백했다. 좌파 문인으로서 주류 문단사의 공백을 메울 귀중한 증언들을 해주었고, 빨치산 활동과 투옥, 북한 방문 때의 비화 등을 자세히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영역 자체가 비주류인 대중예술인들이 다수 포함된 것도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 무속인 김천식 선생이나 일제 시대 대중음악 작곡가 손석우, 만화가 김기율 선생 등이 포함된 것은 자연스레 ‘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효과를 낳았다. 손석우 선생은 <청실홍실> <이별의 종착역> <노란 샤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와 같은 히트곡을 작곡한 음악가. 그를 만난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씨는 “히트곡이 많아 부귀 영화를 누린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주옥 같은 곡 대부분이 음반사의 전속 작곡가로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주 제작’(요즘 말로 하면 인디 레이블)으로 만들어졌다. 대중 음악의 시스템이 재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꼬이게 하고 심지어는 방해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고백했다.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놀란 대목은, 원로 예술인들의 모국어, 혹은 모국 문화에 대한 체험이 후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했다는 점이다. 방송작가 한운사 선생을 만난 이영미씨가 들려주는 선생의 육성이다. “조선 문학은 거의 접촉한 적이 없어. 조선어 독본이라는 게 첨에는 있다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완전 일본놈이 된 거야. 그 시대는 거의가 그랬어. 육사가 나하고 같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거든. 근데 그 사람은 어떻게 조선말을 그렇게 했을까, 난 그게 놀라워.”

미술평론가로 또 미술행정가로 이름을 떨친 이경성 선생의 고백도 비슷하다. “국민학교 1학년 들어가니까 일본말부터 배우기 시작했거든. 조선어라는 것은 3학년 때부터 가르쳐 줬거든. 난 일본말로 쭈욱 책을 읽었기 때문에 해방이 딱 되자마자 한국말로 원고 쓰니까 안돼. 그래서 일본말로 원고 쓰고. 한국 말로 번역을 하는 일이 벌어졌지.”

몇몇 연구자의 귀띔에 따르면, 면담을 진행하다가 친일 관련 질문이 튀어나오자 아예 말문을 닫아 작업이 중단된 사례도 있었다. 이영미씨는 “원로들이 털어놓은 실상은 후대가 막연히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당시 예술과 행적을 논할 때 꼭 고려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구술 대상자와 이후 예정자 목록을 보려면 한국문예진흥원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www. sca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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