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아주 그로테스크한 영혼/허수경 시집
  • 이문재 기자 (moon@e-sisa.co.kr)
  • 승인 2001.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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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씨의 신작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독일에 유학 중인 시인 허수경씨(37)가 최근 펴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영혼 결혼식에서 시작해, 어린 날 세숫대야에 비친 '지친 얼굴'에서 끝나는 시집은 죽음과 전쟁의 그늘 아래에 있다. 죽음은 과거와의 단절까지 포함하고, 전쟁은 한국전쟁부터 동유럽에서 번지고 있는 민족 분규까지 아우르고 있다.




작지 않은 변화다. 1992년 허수경 시인이 작은 배낭 하나만 둘러메고 독일 유학을 떠났을 때, 그녀가 남긴 것은 두 권의 시집이었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 두 시집에 대한 한국 시단의 평가와 기대는 컸다. 능숙한 솜씨로 모국어를 지휘하며 '연민의 시학'이라는 흔치 않은 지평을 열어가고 있던 터였다. 유학을 떠난 이후 틈틈이 장편소설이나 동화·번역 원고 등을 서울로 부쳐왔지만, 그녀는 언제나 시인이었다.


변화는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1990년대 중반에 발표한 독일 시편에서 '갓난 울음 같은 내 신생'을 노래하던 그녀는, 이번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에서 그 신생이 놓여 있는 세계사적 현실들을 목도했던 것이다. 물론 눈도, 입도, 혀도 다 두고 온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완전 소멸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과 가족사에 대한 기억력은 뒤틀려 있지만 아직 완강한 편이다. 하지만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고 '나의 그리움은 이제 자연사할 것'(〈이 지상에는〉)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 속에서 신랑이나 신부, 아가, 어머니 등 생명 생산과 관계된 역할과 기능 들은 기형적이다. 한마디로 심장이 없다. 육신의 어머니는 영혼의 어머니로 전환해 있다. 허수경 시가 개척한 새로운 공간 가운데 하나가 〈붉은 노래〉에 나오는 늘 저녁만 있는 성안 마을이다. 마을에 진주한 '검은 군인'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대지'가 아니고, 아버지는 '나의 내장'일 따름이다.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 아이들의 가슴이 붉은 꽃으로 사용된다. 절망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 이후이다.


허수경 시인은 현재 뮌스터 대학에서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에게 10년 가까운 유학 생활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고, 더 이상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는 지혜를 배운 시간이었다. 그녀가 독일에서 보내온 '오래된 편지'는 절망 이후, 그러니까 '내가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는' 그윽한 시선을 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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