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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출판] 인문학 기획 서적, 씨 마른다

박성준 기자 ㅣ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6.14(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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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그레이트북스' 등 소수만 명맥 유지…
독자·출판사 외면, '암흑기' 올 수도


한길사는 최근 자사의 간판 인문학 기획물인 '한길 그레이트북스'의 판매 성적표를 공개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대가인 에릭 홉스봄의 '3부작'(〈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과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전3권)에서부터 최근 목록에 이름을 올린 마르크 블로흐의 〈봉건 시대〉(전2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50권에 이르는 이 기획물의 각권 평균 판매 부수는 2천4백 부. 책에 따라 최종 완성까지 장장 7년을 투자하는가 하면, 모든 책에 대해 교열만 최소한 세 번씩 보는 진통을 거듭해 만들었지만 들인 공에 비해 결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 기획물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책은 프랑스 출신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지은 〈슬픈 열대〉이다. 1998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한길사가 집계한 결과, 지난 4월 현재 7천6백부 남짓 팔렸다.


도서출판 까치. '까치 글방'이라는 시리즈로 잘 알려진 이 출판사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명저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전6권), 사회과학 분야의 '현대판 고전'인 임마뉴엘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 체제〉(전3권)를 비롯해 인문·사회 과학 방면의 세계적 양서들을 번역해 출판한 인문학 출판사로 손꼽힌다. 이 출판사는 최근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청미래라는 자매 회사를 차려 '무게 있고 딱딱한' 인문학 양서들 대신, 소설·수필 등 비교적 '말랑말랑하고 읽기 쉬운 교양서'를 위주로 한 책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출판사 "인문학 책 펴내기가 무섭다"


도서출판 까치 서혜정 편집장은 "최근 펴낸 '까치 글방' 책들의 판매고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인문학 책 펴내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출판사 운영의 기본 방향은 그대로 유지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인문학 위기는 최근 인문학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1차 진원지는 최근 교수들이 '기초 학문을 홀대한다'며 총장 퇴진 운동까지 불사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선 서울대 등 대학 내부이다. 하지만 위기에 따른 하중은 인문학의 또 다른 현장인 출판계로 고스란히 옮겨지고 있다. 무게 있는 인문학 기획이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고 있다.


문학과지성사와 함께 국내 인문학 출판의 양대 산맥으로 인정받는 창작과비평사는 '창비 신서'를 1998년 9월 없애버렸다. 창비 신서는 1974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아르놀트 하우저)를 시작으로 1998년 막을 내릴 때까지 1백60여 권을 펴내며 한국의 인문학 출판을 대표했던 기획물이다.


출판사측은 창비 신서가 없어졌다고 해서 인문학 출판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지만 이른바 '창비 애독자'들은 이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렇다 할 기획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린이책 출판을 날로 확장하는 등 '외도'가 심해지자 창비가 초심을 잃은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시장 논리의 공세와 대학생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 선전하며 정통 인문학을 고수하는 기획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문학과지성사가 진행하는 '현대의 지성' '우리 시대의 고전' 등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다(아래 표 참조).





'본격 인문학' 표방한 기획 시리즈



















































이름 출판사 특징
우리 시대의 고전 문학과지성사 1996년〈16세기 무신앙 문제〉(루시엥 페브르)를 첫 권으로 현재까지 열한권이 나왔다. 같은 출판사의 '현대 지성' 시리즈 일부가 편입되어 있다. 20세기 이후 서양 역사학·철학 중심
한길
그레이트북스
한길사 동서양 고전 중심. 1996년 한길사가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펴내기 시작했다. 레비 스트로스의〈슬픈 열대〉등 인류 문화사의 정수를 담은 책을 주로 펴냈다. 최근 50권을 돌파했다
모더니티 총서 문학동네 1997년부터 '현재성 경계선의 사유'를 표방하며 펴내기 시작했다. 해석학을 지대성한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Ⅰ),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 가는 자의 고독〉등 모두 여섯 권이 나왔다
입장 총서 도서출판 솔 1990년대 초반 지식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시리즈. 발터 벤야민·김우창 등 국내외 대가들의 저작을 엄선했다. 질 들뢰즈 등 30여 권을 냈으나 최근 개점 휴업 상태
창비 신서 창작과비평사 1974년부터 1백60여 권의 책을 내며 국내의 대표적 인문학 기획물로 군림했으나 1998년 중단. 문학·역사학·정치학 등 인문·사회 분야 책이 주종
대우학술총서 민음사·아카넷 인문·사회·자연 과학 분야를 포괄하는 국내 치대 학술 총서. 1983년부터 민음사가 출간했는데 IMF 사태 때 민음사가 손을 떼자 아카넷으로 넘어갔다. 민음사는 '휴머니티 총서'로 기존 책을 다시 펴내고 있으며, 아카넷을 대우학술총서라는 이름을 이어받아 최근 500권을 돌파했다
까치 글방 도서출판 까치 1980년대 초반부터 인문·사회 과학 전반에 걸쳐 1백80여 권을 펴냈다. 사마천의 〈사기〉 완역.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전6권) 완역 등이 주요 '공적'으로 꼽힌다.
책세상 문고
우리 시대
책세상 문고판 성격의 인문·사회 과학 기획. 〈한국의 주체성〉 등 비교적 시의성 강한 주제를, 전적으로 국내 필자를 동원해 다루고 있다
현대 신서 동문선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문고판 성격이 강하다. 자크 르 코프의 〈중세에 살기〉등 해외 서적 40여 권을 번역했다. 자매편으로 '문예 신서'가 있다

출판 관계자들은 인문학 기획이 저조한 최대 원인을 '시스템 변화'에서 찾고 있다. 인문학 기획의 절대 다수는 해외의 좋은 인문학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대학에 몸 담은 전문 인력들, 즉 대학 교수들이 번역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1990년 중반 이후 대학 사회에서 논문 편수와 저서 등 '실적'이 강조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문학동네가 발간하는 '모더니티 총서'에 관여하는 서영채 교수(한신대·문예창작과)는 "좋은 책을 내놓는 데에는 그만큼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5년이고 10년이고 번역에만 매달려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 개혁 이후 이같은 일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좋은 인문학 기획을 냈는데 팔리지 않는 현상도 출판인들의 사기를 꺾는 주요 원인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알렉산더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 등 난해하고 딱딱해 남들이 기피하거나 아직 국내에 본격 소개되지 않은 책만 골라 소개하는 문학동네의 '모더니티 총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1997년부터 최근까지 모두 여섯 권이 나온 이 총서에 대해 출판사측은 "판매 실적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한두 권 예외를 빼면 모두 초판을 소화하기 급급하다"라고 말한다. 이 기획을 주도한 서영채 교수는 "열 손가락 깨물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지만, 서양 현대 지성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와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 판매가 부진한 것을 개인적으로 특히 안타깝게 여긴다"라고 말한다.


"지식인·출판사, 인문학 위기 돌파 노력 부족"


저서·번역서를 막론하고 정통 인문학 기획이 부진한 현상은 물론 최근 붕괴 조짐마저 엿보이는 인문학 위기 상황에서 기인하지만, 일부 전문가는 현재의 위기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학은 대학대로, 출판계는 출판계대로 위기를 부풀려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계간지 〈세계 문학〉 편집위원이자 새물결 출판사 편집주간인 조형준씨는 특히 대형 출판사와 교수 사회에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협소한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상황이 썩 나쁜 것만도 아니다. 문제는 시장이 어렵다는 핑계로 대학이나 출판사가 자기네에게 부과된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쏘아붙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식인들과 몇몇 인문학 출판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서는 희생과 고통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내의 현실은 대학에 몸 담은 지식인은 물론 대표적인 인문학 출판사들마저 '위기'만을 외치고 있지, 위기를 돌파하려고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판계를 향해 그는 '외국 출판사를 돌아보라'고 외친다. 독일의 주어캄프와 일본의 이와나미 등 자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인문학 출판사들이 오늘날의 명성을 쌓기까지 최소한 한 세대 이상 한 우물을 팠음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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