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가 나라를 없앤다고?
  •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
  • 승인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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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위스 지음 <국가 몰락의 신화>/세계화론에 대한 ‘발전국가론자’의 반격
세계화는 과연 경제 관리자로서의 국민 국가를 무력화시킬 것인가? 세계화론자들은 생산과 금융이 국경을 넘어서 조직되고 통합되는 지구촌 경제 시대에 국민 국가는 거시 경제에 관한 전략을 수립하고 관리하며 사회적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데 권력을 상실하면서 점차 무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보화 혁명과 생산기술 혁명은 생산과 자본 이동에 대한 시간·공간 제약을 해제해 국경의 장벽을 통한 생산 자본과 금융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에 대한 국가 주권이 무력해지고 있는 반면 글로벌 자본과 그를 대표하는 ‘세계 정부’(WTO·IMF 등)가 국가를 대체하여 국민 경제의 조절자·규제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97년 말에 발생한 금융 위기와 그후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구조 조정 과정을 통해 세계 시장이 어떻게 ‘발전 국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방식에 따라 경제를 재구조화해 왔는가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오늘날은 세계화가 아니라 국제화 시대”


린다 위스의 <국가 몰락의 신화:세계화 시대의 경제 운용>(박형준·김남줄 옮김, 일신사)은 이러한 세계화론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격한다. 린다 위스는 먼저 세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경제가 세계화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한다. 세계 경제는 세계화(globalization)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상품·서비스·투자·금융·기술이 국경을 넘어서 세계 시장 세력 또는 초국적 자본의 결정에 의해서 조직·교환·조정되고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면, ‘국제화’란 국민 국가가 국내 경제 활동 통제를 비롯한 중추적 역할을 유지하는 가운데 무역·투자·금융의 국가간 교류와 상호 의존이 증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계화란 ‘경제적 상호 작용의 초국적 연결망에 의해 국가적 (따라서 국제적) 연결망이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린다 위스는 오늘날의 세계가 세계화한 세계라기보다는 국제화한 세계이며, 국제화 수준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그리 높지 않다고 주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국내총생산에 대한 수출 무역의 비중은 1973년보다 1913년이 더 높았으며, 자본 흐름도 1980년대까지는 19세기 말 금본위제 기간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화의 증거로 드는 해외 직접 투자와 금융 통합도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화해 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해외 직접 투자는 대부분 비제조업에 집중되어 있고, 새로운 설비로 건설하기보다는 기존 자산 합병·매수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급격한 해외 직접 투자 증가를 바로 ‘생산의 세계화’가 진전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우며, 세계화 경향의 핵심으로 지적되는 금융 부문의 경우에도 경제협력개발기구 국내 투자의 대부분은 다른 나라들의 저축을 이용하기보다는 여전히 국내 저축에서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이다.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로 거론되는 초국적 기업 현상도 뚜렷하지 않다. 많은 다국적 기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부가가치 활동을 본국에 집중(70~75%)하고, 본국 본부를 유지하면서 국제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적 기업’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국제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경제 현상 분석에 기초를 두고 린다 위스는 초국적 자본이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무력화하고 있다는 세계화론자들의 진단 역시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린다 위스는 ‘영토 국가는 너무 일찍 매장되었다’는 국가주의자들의 반론에 동의한다. 국가 몰락은 애당초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는 새로운 ‘변형 능력(transformative capacity)’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혁신, 국내외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국민 국가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발전 국가들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변형 능력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이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규율 있는’ 지원, 공적 위험 흡수, 민간 부문 거버넌스 확립, 정부·민간 혁신 동맹, 자본과의 공동 프로젝트 등과 같은 ‘관리된 상호의존(governed interdependence)’을 통해 국제화(세계화)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국민 국가는 일반적으로 쇠퇴하고 있지 않으며, 변형 능력 확보와 실천에 따라 세계화의 희생자가 되기보다는 세계화를 유도하는 산파 또는 세계화로 일어나는 문제를 공격적으로 치유하는 해결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몰락의 신화>는 주류 세계화론자들의 ‘국가쇠퇴론’ 또는 ‘국가종언론’에 대한 발전국가론자들의 반론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세계화론자들은 북미·유럽연합·일본으로 무역·자본·기술·투자가 집중되어 3극 지역(triad)과 다른 지역 간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국경 없는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바닥을 향한 경주’로 계층간 소득 격차가 확대됨으로써 사회적 통합의 물질적 기초가 위협받게 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를 다시 불러와야한다’는 국가재호출론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세계화 시대의 딜레마는, 세계화로 인한 문제의 폭발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나, 국가의 권위와 능력이 예전같지 못하다는 데 있다. 위스의 국가 변형 능력 이론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한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 몰락으로 ‘국가중심론’ 타격받아


그러나 위스는 국가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세계화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를 과도하게 해석했다. 첫째,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국제화의 연장이라는 주장은 과도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세계화한 초국적 행위자가 등장하고 있으며, 초국적 행위자로부터 독립하여 국민 국가가 자율적으로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줄어들고 있다.


둘째, 위스가 ‘국제화’(세계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변형 능력을 가진 국가들의 대표적 사례로 든 동아시아 발전 국가가 이 책이 인쇄에 넘어간 순간부터 하나씩 세계화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주장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동아시아 발전 국가는 국가적 연결망이 작동하는 국제화 시대에는 생존·발전할 수 있었으나, 국가의 통제가 어려워진 세계화 시대에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셋째, 스웨덴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은, 세계화가 가하는 개방 압력 때문이 아니라 스웨덴 모델 자체가 안고 있는 수요 관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적·제도적 한계에 기인한다는 주장은 위스가 ‘발전국가론’의 생산주의적 편향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변형 능력을 가진 국가로서 ‘촉매 국가’가 출현하리라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다. 발전국가론자인 저자 자신에 따르면, 세계화 압력이 발전 국가를 대체할 대안적 국가로 하여금 세계화에 친화적인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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