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상 딜레마’는 계속된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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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겉으론 ‘환영’ 속으론 ‘찜찜’…정치적 대표성 문제가 쟁점



장상 총리서리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동안 본인 못지않게 착잡한 쪽이 여성계에 몸 담은 사람들이었다. 장총리서리를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는 이른바 ‘장상 딜레마’ 때문이었다.


지난 7월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이름하여 ‘최초 여성 총리 지명의 의의를 나누는 여성 모임’(여성모임)이 열렸다. 참석자 3백50여 명의 면면은 ‘여성계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광범위했다.


이 모임이 성사되기까지 모태 역할을 한 준비위원 60명의 명단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명단에는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황산성 전 환경부장관,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장관 등 고위 공직자 출신을 비롯해 박영숙·이연숙·정희경·이미경 의원 등 전·현직 정계 인사, 은방희(여성단체협의회 회장)·손봉숙(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지은희(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이경숙(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신혜수(한국여성의전화연합 공동대표) 등 여성단체 인사, 윤후정(이화여대)·신인령(이화여대)·정현백(성균관대) 교수 등 학계 인사, 고은광순(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 운영위원) 등 내로라 하는 여성계의 명망가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처음부터 ‘집단 실력 행사’를 모의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각 직후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 소식에 환영 성명을 발표했던 여성단체들은 그 뒤 장총리서리를 둘러싸고 온갖 시비가 줄을 잇자 사태를 조심스럽게 관망했다. 그렇지만 ‘대통령 유고시 여성 총리가 국방 관련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의 돌출 발언이 나온 뒤 분위기가 급속히 바뀌었다고 한 여성단체 간부는 전한다. 7월15일에 있었던 박영숙 전 의원(여성재단 총재)의 칠순 잔치는 그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성계 인사들은 ‘우리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여성모임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일단 이 모임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여성 흔들기’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 여성 각료가 임명되면 꼭 시비가 일어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정희경 전 의원의 주장이다. 자질은 둘째 문제다. 여성 각료들은 남성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사생활, 곧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한다거나, 옷차림이 촌스럽다거나, 이혼했다는 ‘행실’ 때문에 구설에 오르내려야 했다. 정치권이야말로 가장 전근대적인 성차별 관행이 온존하는 집단이라고 잘라 말하는 정씨는, 따라서 이를 감시하는 여성모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성 위주의 정치판에 상당한 압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성 총리 탄생은 그 자체로서 상징적 사건”





여성 총리 탄생의 의의를 분명하게 사회 공론화한 것 또한 이 모임의 공적이다. 첫 여성 총리가 등장한 시점이나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비판할 여지가 충분하지만 여성 총리 탄생은 일단 ‘그 자체로 파격이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사무총장은 평가한다(<장 상 총리서리 논란, 이렇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것은, 딸들에게 ‘여자도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역할 모델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제도 변화도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여성 총리인 에디트 크레송이 남성 각료·언론과 부딪치다 1년이 못되어 물러났지만, 그녀가 퇴임한 후 남녀 동수 정당명부제가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남총장의 지적이다.


그렇지만 이 모임은 ‘또 하나의 여성 패거리주의가 아니냐’는 비판 또한 감수해야 했다. 특히 7월22일 프레스센터 모임에서 ‘그만한 하자가 없는 공직 인사가 어디 있었는가’(이인호) ‘도덕성을 문제 삼아 법적 하자가 없는 사람을 모욕하지 말라’(정희경)처럼 장총리서리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이 이어지면서 각 언론사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결국에는 치마만 두르면 다 봐 주자는 것인가’라는 식의 비판 글이 봇물 터지듯 올라왔다.


비판은 여성계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한국정신대연구소 신영숙 소장은 장총리서리가 이화여대 총장 재직 시절 김활란상 제정을 주도했던 사실을 들어, 이같은 불철저한 역사 의식이 청문회를 통해 검증되지도 않은 단계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나선 것은 성급했다고 지적했다.


젊은 페미니스트들 “큰언니들의 잔치다”


이정옥 교수(대구가톨릭대·사회학)는 장총리서리가 여성에 대해 ‘생물학적 대표성’은 가질지언정 ‘정치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를 표시했다. ‘자기에게 이득되는 것이라면, 무안하리만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살아 온’ 이 전형적인 중산층 여성에게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여성상, 곧 지역 감정이나 냉전적 사고 같은 남성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상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여성모임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준비위원들은 ‘단체’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가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지만 단체 활동으로 명망을 얻은 지도급 인사들이 사회적 행동에 나설 때는 조직 내부의 의견을 좀더 민주적으로 수렴했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한 30대 실무자의 지적이다. 김활란상 제정을 반대했던 정신대 관련 단체 사람이 장총리서리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며 기가 막혔다는 또 다른 실무자는, 자기네 대표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가 다음과 같은 핀잔만 들었다고 했다. “너희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40대 이상 여성계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장총리서리 지지 움직임을 놓고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이 ‘큰언니들의 잔치’였다고 비아냥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같은 비판은 외부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여성 총리는 탄생해야만 한다’는 대의명분이 여성들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장총리서리를 ‘장총장’ 아닌 ‘장사장’이라고 부르며 그의 학교 경영 방식에 강한 반발을 표시했던 이화여대 일부 학생들 또한 개각 이후 입을 다물었다. “지지하자니 찜찜하고, 덩달아 돌을 던지자니 고통스러워 냉가슴만 앓았다”라는 것이 이 학교 국어국문과 4년 ㅇ양의 말이다.


여성계는 올 초 ‘박근혜를 지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일이 있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당시에도 커다란 쟁점 중 하나가, 과연 생물학적 대표성을 이유로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지지할 가치가 있다’(장정임 <살류쥬> 전 대표)는 주장과 ‘권력자의 후광을 업고 권좌에 오른 남아시아 여성들처럼, 무늬만 여자인 정치 지도자의 등장은 여성계에 오히려 자살골이 될 수도 있다’(이정옥 교수)는 주장이 맞서는 한 여성계의 장 상 딜레마는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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