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신들은 통이 크다
  • 제주·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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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사회 전통 반영한 문화 영웅…유교적 여성상 거부하는 진취적 에너지 내재
한반도는 전국토가 만신전이라고 할 만큼 신으로 가득 찬 나라. 그 가운데서도 1만8천 신이 있다고 전해지는 제주도는 가히 신들의 고향이라 불릴 만하다. 게다가 여신이 유독 많다. 신화 연구자 현용준씨에 따르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는 여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미미한 데 비해 제주도에는 3백50여 개의 신당 가운데 약 80%가 여신을 모신다.





지난 10월3일부터 5일까지 제주도에서는 그런 여신의 에너지를 얻겠다는 여성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최근 내한한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내 안의 여신을 찾자’는 주장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여성 신학자 현 경, 그리고 내로라 하는 여성운동가들이 여신 캠프를 열었다. 창립 10주년을 맞는 여성문화예술기획(대표 이혜경)의 두 번째 여신 기행이었다. 제주 여신은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성격 또한 본토와 확연히 다르다. 양성성을 두루 체현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제주 여신에 관한 설화를 예로 들면 이렇다.



창조신 설문대 할망은 제주도를 만든 여신이다. 어느 날 그는 바다에 섬을 하나 만들 생각으로 치맛자락에 흙을 퍼날랐다. 치맛자락의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은 군데군데 오름이 되었다. 체구가 얼마나 크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발이 앞 섬에 닿을 정도였다. 할망의 이런 ‘스케일’ 덕에 지금도 제주 곳곳의 크고 기괴한 지형은 모두 설문대 할망과 연관되어 있다.



치맛자락에 흙 퍼날라 섬 만들어



농경의 여신 자청비는 제주도 여신으로는 드물게 여성적인 매력과 용기를 두루 겸했고, 가장 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 덕에 가장 자주 공연의 소재가 되었다. 옥황상제 아들 문도령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녀는 부모를 설득해 남장을 한 채 함께 글공부를 떠난다. 그녀는 문도령을 사랑하면서도 그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간계를 서슴지 않을 만큼 성취욕이 강한 여인이다.


때가 되자 과감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린 그녀는 부모 몰래 그와 합방하는데 그 과정 또한 자신이 주도한다. 남편이 된 문도령이 주변 남자들의 시기로 목숨을 잃자 남편을 살리기 위해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서천을 향해 고난의 길을 떠난다. 서천꽃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남장을 한 그녀는, 그곳의 공주와 거짓 결혼을 하고 꽃을 얻어와 남편을 살린다. 그 후에도 자청비는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속은 공주를 위해 문도령을 보내 한 달에 보름씩 신랑 노릇을 하게 하는 아량을 보인다. 후에 옥황상제가 땅을 내어주겠다고 하나, 그는 대신 오곡의 씨앗을 달라고 해 농경의 여신이 된다.






백조 할망은 아들 18명, 딸 28명, 손자 3백68명을 둔 제주 무신의 시조다. 그녀는 농경 사회의 덕목을 대변하는 신으로 불린다. 그녀는 한라산 주변에 사는 산신 소천국과 결혼해 많은 자손을 두었다. 어느날 그녀가 밭일을 하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편 소천국은 점심을 남에게 내어준 뒤 배가 고픈 나머지 밭갈던 소를 잡아먹어 버린다. 그러자 그녀는 “배가 고파 우리 집 소를 잡아먹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웃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도둑놈과는 함께 살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 많은 자식들을 부양할 어려움은 생각지 않은 채 ‘땅 가르고 물을 갈라’ 따로 살림을 낸다.



운명의 여신 가문장아기는 부모에게 밉보여 쫓겨난 ‘튀는 딸’이었다. 누구 덕에 잘살게 되었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부모님 덕이라고 대답한 언니들과 달리, ‘부모님 덕도 있지만, 하늘님 땅님, 내 배꼽 아래 선그뭇(음부) 덕으로 산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집 밖에서 갖은 고생 끝에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 그녀는, 훗날 소경이 된 부모를 청해 잔치를 벌인다. <심청전>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심청이 효를 따르는 순종적인 인물인 데 비해 가문장아기는 당돌하고, 그릇된 언행에는 저주를 내리는 등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본토의 신화가 유교적인 덕목에 따라 가지런히 정돈된 여성상을 보여주는 데 비해 제주의 여신은 그런 도덕률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 탓인지, 제주도의 신화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제주 신화에 관심을 기울인 연구자들은 금세 여신의 존재에 압도당한다. ‘제주 신화 속의 여성 원형’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쓴 김정숙씨는 강인하고 진취적인 제주도 여성의 기질이 여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해석한다. 향토사학자 김순이씨에 따르면, 제주 여신은 새로운 문명을 대변하는 문화 영웅의 면모를 지닌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위계적인 강림이 아니라 바다나 상상의 타지에서 건너와 새로운 문화를 전도하는 수평적 내방이 대부분이다. 갈등이 생기면 상대를 정복하기보다는 땅을 갈라 영토를 개척한다.






그동안 ‘기꺼이 마녀가 되자’고 주창해온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여신’을 핵심어로 집어들었다. 금기를 깨는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신의 창조성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들에게 제주는 성지였다. 여신의 본고장에서 여성들은, 통 큰 모계사회의 흔적을 쫓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행사 마지막 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곳 제주에서 어머니의 손길을 느꼈다”라며 눈물을 글썽여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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