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해도 너무 하네”
  • 로스앤젤레스·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12.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007 어나더데이>, 북한을 극악 무도한 세력으로 묘사



11월24일, 로스앤젤레스 외각 글렌데일의 맨스차이니즈 극장 앞. 방금 <007 어나더데이>(리 타마호리 감독)를 보고 나온 교포 2세들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교포 청년이 말했다. “그동안 007 영화에 적으로 나왔던 나라의 국민들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007 어나더데이>가 12월31일 국내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그러나 흥행 전선이 그리 순탄할 것 같지 않다.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로 반미 감정이 들끓으며 네티즌 사이에서 영화 보이콧 운동이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이 끝난 이후 적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할리우드는 북한이 핵을 보유했다는 소식을 듣고 힌트를 얻은 듯 새로운 적으로 북한을 지목했다. <007 어나더데이>에서 북한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극악 무도한 세력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린 조그만 나라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몰아붙이기는 조금 겸연쩍었는지 제작사는 몇 가지 장치를 이용한다.



본드와 본드걸은 부시와 블레어?



그 첫 번째 방법은 바로 ‘고문치사법’. 이미 <람보>에서 베트콩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써먹었던 수법이다.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도 잡히지 않던 007은 영화 시작 직후 북한군에 잡혀 구타·전기고문·물고문을 당하며 14개월 동안 억류된다.
두 번째 방법은 ‘모든 북한 군인 악인화’. 부하를 자루에 넣어 마구 때리고 야심 때문에 아버지까지 죽이는 극악무도한 장교나, 폭탄 파편을 맞고 흉측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악인이 이들이 맡은 역할이다.



세 번째 방법은 ‘과장법’.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기 위해 제작사는 북한을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국가로 그린다. 아직 퍼스널 컴퓨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북한에서 초소형 컴퓨터로 007의 신원을 파악해내고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인공 위성을 이용해 터뜨린다.



<007 어나더데이>의 본드걸은 흑인 여배우 할리 베리가 맡았다. 흑연 여배우를 본드걸로 등용한 것은 할리우드가 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외부의 적으로 눈을 돌리게 해서 어수선한 미국 사회를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미국 국가정보국 요원으로 나오는데, 미국 스파이와 영국 스파이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신자유주의 노선에 호흡을 척척 맞추는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