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과잉’ 그늘에 교양의 등불 켠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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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 주인 되려는 ‘공부하는 시민’늘어
"교양 있는 척하면 쏴 버리고 싶다.” 애니메이션계의 악동 빌 플림턴은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를 발표할 당시 이 한마디로 전세계 관객을 열광시켰다. 맞다. 교양 있는 척하는 부류는 어디를 가나 환영받기 어렵다. 영화 <친구>를 재미있게 보았다는 친구들 앞에서 에이젠슈타인을 들먹거리거나, 어제 본 드라마 <야인시대>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직장 동료들 앞에서 지라르의 폭력론을 화제로 꺼내는 사람은 모름지기 돌아서는 순간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헷갈려서는 안될 것이 있다. 교양 있는 ‘척’하는 것과 교양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플림턴 또한 교양 있는 사람 그 자체를 응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기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한다. 제목부터 단도직입적인 책 <교양>(들녘 펴냄)이 1년 사이 6만 부 이상 팔려 나가며 스테디 셀러로 자리 잡은 현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 영문과 교수인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지은 <교양>은 1999년 출간 이후 <슈피겔>이 선정한 베스트 셀러 비소설 부문에서 100 주 이상 3위 안에 머물렀다는 화제의 책이다. 그렇지만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인문·예술 지식을 백과전서 식으로 간추린 데다 책값마저 3만원대로 만만치 않은 이 책이 한국에서까지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끌리라고는 출판사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386세대의 뒤늦은 후회와 열정



그런가 하면 철학·문예·학술 이론 따위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설 아카데미의 교양 강좌에도 일반인이 몰리고 있다. 이들 강좌는 백화점 문화센터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박 겉핥기식 교양 강좌와는 궤를 달리한다. 깊이 있고 팽팽하게 수업이 진행되는데도 학생 대비 일반인 수강생의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91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다면 왜? <교양>의 부제가 이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 준다. 책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잃어 버린 교양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배우고 싶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인터넷 서점 집계에 따르면, <교양> 붐을 주도한 것은 이른바 386세대 남성 독자층이다. 이를 두고 들녘출판사 경현주 편집장은 “대학 다닐 때는 사회과학 서적, 사회에 나온 뒤로는 업무와 관련된 전공 서적만 편식하던 이 세대가 뒤늦게 교양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우리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교양은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비단 개인의 경쟁력뿐 아니다. 미국 문화역사학자인 모리스 버먼(<미국 문화의 몰락>)이나 일본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는 약속이나 한 듯 교양 수준 저하가 미국과 일본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는 ‘지적 망국론’을 잇달아 개진하고 나섰다.






모리스 버먼이 1차적인 교양의 적으로 규정한 것은 비디오·게임기이다. 이들 전자 제품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른바 ‘백색 소음’은 얼핏 생명력이 넘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죽음의 전조를 읽어내는 버먼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네 가지 징후, 곧 갈수록 고착화하는 빈부 벽차, 불완전한 사회보장 제도, 대기업이 주도하는 소비 자본주의, 형편없는 지적 수준이 ‘미국의 가을’을 앞당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버먼이 ‘셰익스피어도 모르는 미국의 대학 교수들’에 절망했다면, 다치바나는 일본 엘리트의 무교양이 일본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질타한다. 한국의 지식층이라 한들 그의 다음과 같은 독설 앞에서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이는 드물 듯하다. “비즈니스적 교섭 상황에서는 일본의 엘리트들도 나름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교섭이 끝난 뒤다. 어떤 교섭이든 교섭이 끝난 뒤에는 비즈니스를 떠나 담소를 나누는 형식으로 회식이나 파티를 벌이는데, 그런 경우 일본의 엘리트들은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대화할 소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심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문화적 교양인데, 일본의 엘리트에게 가장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문학·철학·예술 다방면에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교양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잡다한 지식은 많아도 교양은 없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널려 있다”라고 도정일 교수(경희대·영문학)는 개탄한다. ‘지식의 총합=교양’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교양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와도 통한다. 영어로 컬처(culture), 독일어로 빌둥( bildung)이라고 쓰는 교양은 18세기 무렵 유럽에서 본격 대두한 개념으로, 인간의 내면을 ‘형성’ 내지는 ‘도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빠져, 또는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서 쇼핑하는 재미에 빠져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내면 도야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학술 계간지 <비평>은 이에 따른 위기 의식을 반영하듯 이번 겨울호에서 ‘21세기와 내면성의 위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여기 실린 문학 평론가 이남호씨(고려대 교수)의 글(<전자시대의 문화적 성격과 내면성의 빈곤>)에 따르면, 우리 시대가 직면한 내면성 위기는 문학 작품에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960년대에 발표된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1990년대에 발표된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좋은 예다.



<무진기행>과 <은어낚시통신>



두 작품의 주인공은 둘 다 사회 부적응자라 할 수 있다. 고독하고, 사적이며,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에게 삶의 위기는 곧 정체성의 위기이며 내면의 위기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치열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은어낚시통신>의 주인공은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어떤 내면적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기와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을 지닌 사람들, 곧 짐 자무시와 뭉크와 티베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만나 동질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이처럼 네트워크 시대의 개인은 더 이상 프라이버시와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으려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남호 교수는 전자 문명이 인간들로 하여금 사이버 공간이라는 어마어마한 미지의 공간을 가지는 대신 내면적 공간을 포기하는 파우스트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네트워크 사회, 소비 사회가 진행될수록 교양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높아진다고 지식인들은 입을 모은다. 교양은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일단 교양의 핵심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철학자 김상봉씨(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는 이를 풀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돌이켜 생각할 수 있고,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교양이라고 정의한다. 아무리 박학다식한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처한 문제를 바르게 판단하고 해결할 수 없다면 그의 지식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대학에서 행하는 주입식 교양 교육의 한계가 이것이다). 진짜 교양을 갖춘 사람은 주관적인 감정이나 욕망이 아닌 객관적 근거에 입각해 자기 주장을 펴되, 그 근거가 공공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서 누구에게라도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소통 능력이 바로 교양의 두 번째 핵심이다. 법학자이면서 미술 에세이를 발간하는 등 지식 사회의 갇힌 경계를 자유분망하게 넘나드는 박홍규 교수(영남대·법학)는 같은 얘깃거리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교양이라고 말한다. 잡다한 지식을 뽐내며 식탁에서 대화를 혼자 주도하는 것이 교양은 아니다. 진짜 교양인은 평범한 유머 속에서도 반짝반짝하는 비범함으로 좌중을 끌어들인다. 박교수에 따르면, 그 비결은 관용에 있다. 어떤 문화권, 어떤 연령대 사람이라도 허용할 수 있는 관용의 정신이 그와 같은 소통 능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교양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지식 공동체인 ‘수유연구실 연구공간 너머’의 공동 대표 고미숙씨(문학 평론가)는 도시 중산층의 허구적인 삶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교양에 눈 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중산층은 자동차·신용카드 따위에 길든 삶 속에서 광고가 시키는 대로 무심코 이것저것을 소비하며 이것이 진짜 ‘나’인지, 아니면 진짜 ‘나’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 헷갈리며 살아간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단언컨대, 이런 ‘나’를 이끄는 것은 ‘가짜 욕망’이다(<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인위적인 자극을 받아 생겨난 가짜 욕망은 낭비를 부르고, 인간 사회의 극심한 경쟁을 부른다. 그런데도 인위적인 수요를 끊임없이 창출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자본주의 문명은 자연 및 세계에 대한 공격과 파괴와 죽임을 계속 확대해 간다. 이같은 악순환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욕망과 가짜 욕망을 판별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것이 곧 교양이다.



“나를 이끄는 것은 가짜 욕망” 깨달아야



사실 ‘교양 있는 인간’을 꿈꾸기에는 우리 사회의 여건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박홍규 교수는 “‘다름’에 대한 관용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국가보안법이나 호주제가 엄존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교양이 싹트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라고 반문한다. 한국이 세계적인 정보 기술(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빨리빨리’ 문화 또한 ‘느림과 성찰’이라는 교양 특유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한국의 네티즌은 지난해 길거리 응원과 촛불 시위를 통해 ‘스스로 판단할 줄 알고, 더불어 소통할 줄 아는’ 성숙한 교양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김상봉씨는 평가한다.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는 교양을 일컬어 ‘우리의 고정 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물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했다. 계미년 새해, 자신의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교양의 신선한 물줄기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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