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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지만 따뜻한‘얼음 지옥’ 엑소더스

발레리안 알바노프 지음 <위대한 생존>

강철주 편집위원 ㅣ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1.06(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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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8월28일 러시아 탐험선 세인트안나 호가 선장 브루실로프를 비롯한 대원 24명을 태우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항했다. 바다 코끼리·북극곰·물개·고래 같은 생물 자원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북극해 북동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12년 10월15일 이 배는 북극해 초입에서 유빙 사이에 얼어붙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선장은 얼음이 녹기만을 기다릴 뿐 무대책으로 일관했고, 그같은 ‘자연의 감금’은 1년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대원들 사이에서는 선상 반란 같은 불온한 조짐마저 감돌았다. 1914년 4월10일 항해사 알바노프는 선장의 허락을 얻어 자기와 함께 행동하기를 원하는 대원 10명을 이끌고 세인트안나 호를 떠났다. 그는 선장처럼 배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남쪽에 있는 ‘육지’를 찾아나서는 것이 살아 남을 확률이 훨씬 높다고 확신했다.

알바노프의 <위대한 생존>(홍한별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은 세인트안나 호를 떠난 저자가 세인트포카 호에 구조되어 1914년 9월1일 아르항겔스크 항에 안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생환 일기’이다. 알바노프 일행은 세인트포카 호에 구조될 때까지 90일 동안 장장 435km에 이르는 ‘얼음 지옥’을 썰매와 스키, 카약에만 의지한 채 가로질렀다. 극한의 추위, 부족한 식량, 대원 간의 갈등 등 어려움은 끝이 없었다.

‘거북이에 비유한다면 거북이에 대한 모욕’이 될 만큼 힘겹고 느리게 전진했고, 설맹(雪盲)과 괴혈병,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사지 마비·정신 착란에 시달렸으며, 죽음의 행군을 견디지 못한 일부 대원은 식량과 무기를 훔쳐 달아나는 치명적 배신 행위를 저질렀다. 씻지 못해 얼굴에 두껍게 달라붙은 때를 벗기려고 손으로 문지르면 문신처럼 선명한 자국이 났고, 젖은 붕대를 감고 있는 듯한 옷을 벗어놓으면 옷 속에 이가 하도 많아 옷이 걸어다닐 지경이라는 푸념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인간적 약점까지 솔직하게 드러내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사람은 알바노프와 선원 콘라드, 2명뿐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행군 도중에 죽거나 실종되었다. 선장과 함께 배에 남았던 이들 역시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실패한 섀클턴이 전대원과 함께 무사 귀환한 것에 비한다면, ‘위대한 생존’이었지만 초라한 생환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알바노프에게서 실패한 탐험가의 영웅적 비장미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는 탐험대장이 아니었다. 다만, 선장하고 같이 있다가는 죽을 것이 뻔해 ‘독립해서’ 살 길을 찾아나섰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 남기 위해 온힘을 다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알바노프는, 게으르고 말 안듣고 실수 연발에다 도무지 생각이라고는 없는 대원들에 대한 불평과 연민을 수시로 드러냈다. 기분이 상하면 대원들을 마구 때렸다. 도망간 배신자들을 찾으면 바로 쏘아 죽이겠다고 증오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나타나 용서를 빌자 다시 일행에 합류시켰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두려워하는 인간의 옹색함과, 기다림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권태의 고문’도 그대로 표현했다. 때로는 환각과 악몽까지 솔직하게 기록했다. 난파한 기억과 구조되리라는 희망으로 과거와 미래만을 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현재를 누리는 문명 세계의 사람을 그리워했다. 세인트포카 호에 구조되기 직전에는 문명인과의 감격적인 첫 만남을 위해 그동안 걸치고 있던 누더기 옷 대신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고 몸단장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초라하지만 위대하다. 처절하지만 따뜻하다. ‘하얀 죽음의 땅’에서 벌인 고난의 엑소더스는 알바노프의 이처럼 생생한 서사를 만남으로써 극지(極地) 문학의 걸작으로 살아 남았다. <위대한 생존>은, 감동을 얻기 바라는 독자들을 위한, 기록이자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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