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중은 왜 독재에 환호했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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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중독재 국제 학술회의’ 열려
‘나치는 많은 부문의 노동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 특히 히틀러에 대한 믿음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독일의 역사학자 알프 뤼트케가 펴낸 <일상사란 무엇인가>(청년사)에 소개되어 있는 1930년대 독일 망명 사회민주당의 비밀 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대중의 동의란 바닷가의 모래성 같아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한 말인데, 그가 대중의 동의에 의한 지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잘 드러내준다. 파시즘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당시 노동자 계급이나 시민 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구술 연구는 많이 남아 있다.

파시즘과 나치즘, 스탈린 치하, 유신 시대 같은 독재 체제에 환호하는 대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서양사학자 임지현 교수(한양대)가 2년째 천착하고 있는 주제다. 그가 이끄는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학술진흥재단과 프랑스대사관의 지원을 받아 오는 10월29~31일 한양대에서 ‘대중독재’를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대회인 올해의 주제는 ‘대중독재:동의의 생산과 유통’.

임지현 교수는 20세기 독재 체제는 전근대 전제 체제와 달리 강제와 폭압만이 아닌 대중의 동의와 자발적 동원에 의해 지탱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중독재 개념은 이같은 근대 독재 체제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동원 메커니즘을 포착하기 위해 임교수가 고안해낸 학술 용어다.

연구는 임교수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999년 정부가 박정희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는 역사단체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기념관 건립에 반대했고 심포지엄 말미에 반대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수들의 기대와 달리 일반 여론은 기념관 건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박정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권력 담론의 관점에서 해명해 보고자 연구를 시작했다는 임교수는 “20세기 독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독재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비난하거나 그것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임교수의 대중독재론은 지난해 10월 열린 제1차 국제 학술대회에서 온전한 이론 형태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곳곳에서 참가한 학자들은 20세기에 나타난 좌우 독재 체제의 경제 시스템, 교육제도, 복지제도 등을 비교 분석하면서 대중독재 담론의 학술적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1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던 논문들은 지난 4월 말 <대중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책세상)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이후 국내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낳았다.

첫 반론 주자는 국내 진보 학계의 대표 주자인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정치사회학). 조교수는 <역사비평> 여름호에 발표한 <지배·전통·강압·동의-박정희 시대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글을 통해 ‘대중독재론이 강제와 억압의 시각으로만 접근했던 기존 연구의 빈틈을 메워준 점은 긍정적이지만, 강압의 내면화를 통한 적극적인 대중을 강조함으로써 파시즘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대중독재 담론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과거 청산이 미흡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간과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조교수는 지적했다.

독재 체제, 대중에게 ‘정치 종교’로 작용

이에 대해 임지현 교수는 조희연 교수가 자기 글을 오독했다면서 “대중독재론을 일부 우익들이 전용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그들의 책임이며, 대중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문제가 아니라 소수의 나쁜 ‘그들’과 다수의 결백한 ‘우리’라는 설익은 도덕주의로 복잡한 현실을 재단하려는 기존 연구자들의 시각이 문제다”라고 반박했다.

논쟁은 9월 초 열린 문화사학회 주최 토론회에서 다시 벌어졌다. 김택현 교수(성균관대·사학)는 “대중독재 담론은 지금까지의 독재 체제 분석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새로운 것이 있다면 대중독재라는 용어밖에 없다”라며 개념의 모호성을 집중 제기했다.

김동택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정치학)는 “대중독재 프로젝트는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든다는 분명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지만, 현실 정치에 적용되기에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근본주의적이다.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에 대한 반성, 내 탓이라는 반성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라고 비평했다.
임지현 교수는 이에 대해 “대중독재는 완성된 개념이 아닌 현재진행중인 프로젝트이며, 논쟁이 후속 연구에 대한 생산적 비판과 논쟁으로 발전해 가기를 기대한다”라고 응답했다.

10월29일부터 열리는 제2차 국제 학술대회는 국내 학계에서 쏟아졌던 비판에 대한 우회적 답변이자 대중독재론을 이론적으로 살찌우려는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다. 대중독재의 개념 설정에 집중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대중독재 체제가 대중의 동의와 참여를 어떤 방식으로 끌어냈는지 구체적으로 탐구할 예정. 이를 위해 참가자들이 찾아낸 것이 ‘정치의 신성화와 미학화’라는 패러다임이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연구자 에밀리오 젠틀레 로마 대학 교수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정치의 신성화>라는 발표문에서 20세기 독재 체제가 대중 속에서 일종의 ‘정치 종교’로 작용하면서 동의와 협력을 얻어냈다고 분석한다. 대중이 체감한 것은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국가·민족·인종과 같은 상징에 대한 집단적 의례와 광신적 헌신,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지도자 숭배와 같은 정치종교적인 특징들이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대중독재 체제는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 자신들의 비전을 미학적으로 치장하는 데 열중했다고 참가자들은 주장한다. 이진일·이종훈 교수(한양대 연구교수)와 피터 램버트 웨일스 대학 교수 등은 대중독재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동의 창출 메커니즘의 사례로 영웅 만들기를 든다. 이순신 장군이나 잔다르크 같은 과거의 엘리트 영웅에서부터 이승복 어린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 영웅 등 평범한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영웅이 등장하는 것도 대중독재의 특징이다.

이밖에 학술대회에는 찰스 암스트롱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북한 김일성 체제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모두 17명의 국내외 학자가 참가한다. 이번 대회의 성과물은 내년 2월께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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