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팝아트’ 전시 봇물 터졌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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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현상·네티즌 문화 등 소재로 한 ‘한국적 팝아트’ 전시 봇물
 
“제겐 고흐와 피카소보다 서태지가 더 위대한 스승입니다.” “서태지는 하나의 우주입니다.” 일군의 신세대 작가들이 가수 서태지에 대한 헌정 전시회를 갖고 있다. <내 열정의 씨앗>(10월28일까지 희망갤러리)이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살아생전(撒芽生展; 서태지로 씨앗을 뿌려 삶을 펼쳐나간다)’ 동인 6인이 주최했다.

<내 열정의 씨앗>전은 그리 대단한 전시회는 아니다. ‘살아생전’ 동인은 이제 막 화단에 얼굴을 내민 풋내기 작가들이고, 전시회가 열리는 희망갤러리는 가정집 창고를 개조한 조그만 실험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한국적 팝아트의 현주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팝아트는 1950년대 후반 영국에서 발원한 것으로 매스 미디어에 의해 친숙해진 대중 문화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주로 대중 사회의 천박성을 까발기는 예술 사조다. 1960년대 초반 뉴욕을 중심으로 발전한 팝아트는 앤디 워홀·라우센버그·로젠퀴스트·올덴버그 같은 거장을 배출하며 현대 미술에서 가장 큰 조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서 발원한 팝아트가 미국에서 폭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를 장악한 미국의 화려한 대중 문화 덕분이었다. 마릴린 먼로·코카콜라·슈퍼마켓 등 강렬한 시각 이미지를 지닌 미국 대중 문화를 소재로 차용함으로써 팝아트도 힘을 받을 수 있었다. 팝아트는 예술과 대중 문화의 관계를 재설정했는데, ‘벨벳 언더그라운드’ ‘롤링스톤스’ 같은 그룹은 앨범 표지에 앤디 워홀의 작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중문화를 현실로 인정하고 즐겨


1990년대 들어 한국 작가들 중에서도 팝아트 성향의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은 미국 작가들의 아류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패러디의 원전이 되는 대중 문화가 미국의 대중 문화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종속된 대중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했던 한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접근법에서도 미국 작가들처럼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일본 대중 문화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 시기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는 바로 ‘아토마우스’의 이동기씨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아톰’과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 ‘미키마우스’를 결합한 아토마우스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은 외래 문화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던 한국 대중 문화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팝아트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 대상은 나이키·코카콜라·스타벅스·버거킹 등 주로 다국적기업 브랜드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 대중 문화가 폭발하면서 팝아트에서도 이전과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변화는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한국적 팝아트의 소재가 한국의 대중 문화로 바뀐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 문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의 김기용 큐레이터는 이런 변화에 대해 “우리 미술의 자생성이 증가한 결과다. 이전의 경향과 달리 대중 문화를 현실로 인정하고 이를 즐기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세대 작가들은 대중 문화를 분석하고 소비물신주의를 훈계하려고 하기보다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즐기려는 경향이 강하다”라고 분석했다.

앤디 워홀의 뮤즈가 마릴린 먼로였듯이 <내 열정의 씨앗>전 작가들은 서태지를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이들은 서태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서태지를 괴롭히는 팬덤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택했다. 전시회에 참가한 작가 심미현씨(28)는 “서태지가 싹틔운 열정의 씨앗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형상화했다”라고 작품을 설명했고, 작가 이문경씨(24)는 “서태지는 나무였다. 그가 일으킨 광합성이 우리에게 자양분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살아생전’ 작가들은 심미현(심미) 이동훈(매니아동훈) 이문경(이문경) 안성희(서양이) 이명은(이루) 정국현(울태) 등 자신들이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사용하던 아이디를 이름과 함께 명기할 정도로 작가보다 팬클럽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이들은 서태지라는 대중 문화 상품이 자신들의 예술 행위로 인해서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전시회 이름에서 서태지라는 단어를 빼고 서태지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등 최대한 배려했다.

온라인 게임이나 아바타 같은 인터넷 문화도 한국적 팝아트의 주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지난 8월, <10년후 v2.0 게임아트>전에서 선보인 이종석씨의 <삶은 게임이다>는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전까지 화투를 원형으로 한 팝아트는 많았지만 이씨처럼 온라인 게임을 끌어들인 경우는 드물었다. 이외에도 김학민씨가 아바타를 작품의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고, 미디어 아티스트 양아치는 싸이월드 현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한글다다>전(11월5일까지 쌈지스페이스)에 참가하고 있는 진기종씨는 네티즌 문화를 소재로 삼았다. 그가 소재로 삼은 것은 ‘’이라는 단어였다. 원래 가수 문희준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던 이 의성어는 이후 황당한 느낌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발전했다. 진씨는 “수없이 많은 의미로 해석되는 이 단어의 특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라는 글자 안에 많은 조그만 글자를 적어 넣고 이를 카메라로 스캔해서 모니터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원조 교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고생의 이미지를 끌어내거나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북한의 전체주의 문화를 다루는 작가가 나타나는 등 한국적 팝아트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 신현진씨는 “팝 문화와 광고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 팝아트가 섹스와 소비물신주의에 대한 고찰로 확장되었듯이 한국적 팝아트 역시 소재와 주제를 다양하게 확장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물질 문명 숭배하는 소비 사회 옹호하기도

 
한국적 팝아트의 특성 중의 하나는 관람객과 만나는 방식에서도 실험적이라는 것이다. 산본역과 금정역 사이의 인근 주택과 건물 옥상에 전시된 <철길 옆 옥상>전(10월30일까지)은 한국적 팝아트의 발랄함을 보여준다. 익히 보아 온 만화적 이미지를 일상의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를 검정 테이프를 이용해 만화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그룹 엽의 작업은 관람객을 만화의 주인공으로 느끼게 하는 효과를 꾀하고 있다.

한국적 팝아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대중 문화와 대중 소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다. 신세대 작가들은 대중 문화가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억압의 기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들은 물질문명에 대한 숭배를 그대로 고해성사한다. 명품 철갑을 두른 전통 여성상을 통해 ‘명품 선호 사상’을 나타낸 작가 낸시 랭처럼 이들은 오히려 대중 소비 사회를 적극 옹호한다.
지난 10월24일까지 아티누스 갤러리에서 열렸던 <미술 속 광고>전은 광고에 대한 신세대 작가의 우호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는 지하 1층(신세대 작가)과 지상 2층(기성 작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류옥희·전준호 씨 등 기성 작가들이 광고에 대해 냉소적으로 접근할 때, 주효진·이주영 씨 등 신세대 작가들은 광고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를 꾀했다.

 
주효진씨는 자신이 신고 싶은 명품 구두의 이미지를 모아 자화상을 재구성했다. 명품 구두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 구두를 통해 구성해낸 것이다. 이주영씨는 자기 작품을 광고 포스터처럼 제작해서 실제 잡지에 광고처럼 실었다. 광고가 갖는 대량 전달력을 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김민성씨는 “신세대 작가들은 광고를 예술에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광고의 전략까지 끌어들인다”라고 말했다.

작가들 사이에 한국적 팝아트에 대한 활발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면서 보수적인 갤러리들도 대중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다. 대림갤러리는 가장 상업적인 패션 사진에서 예술의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패션사진, B컷으로 보다>전(내년 1월16일까지)은 상업성이 거세되었다는 이유로 배제된 B컷 사진을 모아 전시함으로써 예술과 상업주의의 경계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한류가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아시아 팝아트 작가의 작품에 한국 대중 문화가 원형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볼 날도 머지 않아 보인다. 한국 대중 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아시아 작가들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김기용씨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 대중 문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볼 날이 곧 올 것이다. 이제 한국적 팝아트는 실험성에만 머무르지 말고 깊이에도 천착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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