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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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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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모두 잘 알다시피 <사계>라는 노래의 가사다. 요즘 젊은층이 아는 것은 물론 그룹 ‘거북이’가 리메이크한 힙합곡 <사계>다. <사계>는 대단히 흥행해 한동안 FM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왔고, 초등학교 다니는 내 딸은 컴퓨터의 MP3 앨범에 이 노래를 저장해놓고 매일같이 틀어댔다. 이 발랄한 리듬의 대중 가요가 원래 1980년대 공장노동자들의 현실을 노래하는 이른바 ‘운동권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그저 우리 세대나 알까. 1985년쯤 노래모임 ‘새벽’이 산업체 부설학교 학생들의 처지를 소재로 노래극 <부설학교>를 기획했고, 그 삽입곡으로 문승현씨가 작곡 작사한 것이 <사계>였다.

거북이의 리메이크곡 <사계>는 빠른 비트에다 랩을 섞어 가사와 상관없이 경쾌하고 발랄해서 듣기에 즐겁다. 그저 한 가지 빠져 있다면 이 노래의 태생에 대한 기억이다. 5월1일 노동절은 이른바 ‘근로자의 날’이라고 해서 은행도 놀고 기업체도 놀고 관공서도 놀았다. 게다가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까지 이어진 5월 초순은 징검다리 연휴라고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관광지와 유흥지의 호텔들이 예약 만원 사태였다. 백과사전에서 ‘노동절’을 찾아보면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 의욕을 높이기 위해서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라고 명쾌한 정의가 나와 있다. 여기에도 역시 빠져 있는 것은 ‘역사’다.

2003년의 노동자들처럼 1886년 5월1일의 미국에서도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았다. 휴가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파업에 돌입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말의 미국에서 노동자 계급이란 흑인 노예들이 명칭과 신분을 바꾼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파업 노동자 6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노동운동 지도자 5명이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러시아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의 전기에는 그녀가 경험했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풍경이 그려진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맞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세계 각국이 과학 기술과 산업 발전의 성과들을 전시하고 에펠 탑이 완성되고 해서 대단한 성황이었다. 하지만 대개의 유럽 지식인들은 다른 행사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고 하는데,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켠에서 열린 국제노동자대회였다. 대회의 주제는 산업 발전의 이면에 있는 노동자의 현실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국경을 넘어 모든 나라에서 매년 5월1일에는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5월1일, 메이데이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메이데이를 애써 무시하려는 정부와 메이데이를 되찾으려는 노동자들의 실랑이가 계속되어 왔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노총 창립일인 3월10일을 ‘근로자의 날’로 만들어 ‘모범 근로자’를 포상하는 등 행사를 했다. 1990년대 들어 5월1일이라는 날짜는 되찾았지만 명칭은 여전히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이다. 메이데이의 원래 취지를 빨리 잊어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뜻이다. 황금 연휴를 최대한 신나게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메이데이의 의미가 끼여들 틈은 없다.

며칠 전 다른 볼 일이 있어서 광주에 갔다. 올해 5·18 기념 행사는 대통령도 참석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공항 터미널과 기차역에는 5·18 안내 팜플렛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이 쉰쯤 되어 보이는 택시 기사는 우리가 외지인인 것을 알자 묻지도 않았는데 당시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의 처형(妻兄)이 시위 구경 나갔다가 총 맞아서 죽었다 한다. 나는 1980년 5월의 열흘 동안 이 도시를 장악했던 그 어마어마한 공포의 한 자락이 전해져 와서 어떤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진실로 두려운 것은, 그 공포의 의미도 언젠가 이름과 껍질만 남은 채 잊힐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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