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달러 시대’ 바로 보기
  • 박상기 (연세대 법대 학장) ()
  • 승인 2003.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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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현재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은 국가는 24개국. 중동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뿌리 내린 나라들이다. 이는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내 준다.”

동북아 중심국가론과 함께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이 경기 침체와 북한 핵 문제 등으로 가라앉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목표 설정은 김지하의 시처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는 볼 수 없다. 2만 달러는 한국 사회를 성숙한 시민 사회로 발전시키기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목표 수치라고 본다.

2002년 현재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은 국가는 24개국이라고 한다(<시사저널> 제716호 27쪽 참조). 이들 국가를 살펴보면 중동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주의가 제도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린 나라이다.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는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면 민주주의도 발전하게 된다고 했다. ‘선 성장 후 분배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어느 단계까지 적용 가능한 정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선진국 진입도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러한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사회 통제가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를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정치 권력의 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국가적 분위기로는 개방과 자율을 속성으로 하는 선진 사회는 이룩할 수 없다. 만일 경제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상태에서도 계속 발전할 수 있다면 우리 나라는 벌써 군사 정권 시대에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다.

선진국은 사회 전반에서 선진화가 이룩된 사회를 말한다. 그리고 경제 발전 이후에 사회 선진화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정상적인 발전이 수반된 국가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동안 경제 발전에 상응하는 정치적·사회적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점이 문제이다. 개인의 창의성을 떨어뜨리고, 사회를 경직되게 하는 비민주적인 법률 제도와 관행도 벗어 던지지 못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 자리 잡지 못한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흔히 시장 기능을 강조하지만 이는 시장의 생명인 공정성이 확립된 다음에나 주장할 수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기업의 지배 구조가 정상적이고 투명한 경영이 선행되지 않으면 노사 간에 신뢰가 형성될 수 없으며, 이 상황에서 노사 분규는 극단으로 흐르기 쉽다. 또한 정치적 부패가 근절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진국형 정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고참병의 구타와 성추행으로 휴가병과 의경이 자살하는데도 이를 부인하거나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군대와 경찰 조직의 행태를 그대로 둔다면 국방의 의무는 남의 몫으로 돌리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러한 후진국형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경제 성장과 하강이 반복되는 정체된 사회로 갈 가능성이 높다. 1995년에 달성한 1만 달러 시대가 외환 위기로 주저앉고, 금 모으기와 같은 억척스러움으로 다시 1만 달러를 회복했지만 언제 과거로 되돌아갈지 모른다.
경제학자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좋은 사회(The Good Society)’의 조건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폐해가 없는 방법과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는 방법을 구별하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SK글로벌’ 사건이나 ‘굿모닝시티’ 사건은 후자의 전형적인 예로서 아직 우리의 제도가 이러한 범죄 행위를 가능하게 할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 여건이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 성장의 장애물을 보는 관점은 정확해야 한다. 사회가 투명하고 사회 구성원의 미래 설계가 예측 가능한 제도 속에서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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