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인 그리고 정치 자금
  • 박상기 (연세대 법대 학장) ()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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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이 다시 구속되었다. 고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혐의이다. 진실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 실세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구속되는 우리 정치의 패턴은 여전하다. 정치의 중심 인물과 정치 제도가 아직도 변화하는 사회에 뒤떨어지고, 국회의원 신분을 출세의 상징으로 여기는 후진적 인식이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돈은 권력을 가진 한국의 정치인이 노리는 주요 목표이다. 그래서 특혜를 바라는 기업은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치인은 정치 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는 현실이 반복되어 왔다. 이것은 우리 정치가 극복해야 할 최대 과제이지만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또는 기업인의 처지에서는 후환 때문에 양측이 모두 ‘불륜 관계’를 계속해온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경 유착의 고리를 단절하지 않는 한 정치인도 기업인도 떳떳할 수 없으며, 국회의원에게서 국민을 위한 입법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현행 ‘정치 자금에 관한 법률’(정치자금법)에 따르면 어느 경우에도 정치 자금은 정치자금법에 따라서만 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공개성을 원칙으로 하는 이 법에 따르지 않는 금품 수수 관행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정치 자금’이 정치 이외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정치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국회의원들 스스로 돈이 적게 드는 정치를 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를 사실상 포기한 것도 현실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사회 환경이나 정치 현실이 돈을 쓰게 한다고 하소연한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제도나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정치인 역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정치 현실을 정치인들이 공동으로 타개하고 바꾸겠다는 의지만 있었다면 오늘날 정치 부패 현상은 상당히 약해졌을 것이다.

결국 파벌 정치의 득을 보는 측에서는 정치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렇게 확보된 자금을 개별 정치인에게 지급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계파의 보스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정치 자금이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축재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치적 뒷돈을 챙기는 사람은 자신의 위상을 격상시킴과 동시에 자금을 유용해 개인의 치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를 하여 돈을 버는 이러한 현실은 후진국 정치의 가장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정치 권력은 소유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물신화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정치 권력을 놓고 온갖 사회적 연고주의가 등장해 쟁투를 벌이는 수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방법은, 힘들지만 정치 권력의 정당성의 원천인 국민의 의식이 깨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 자금이 적게 드는 정치 제도를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이 가운데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정당 명부제 등으로 바꾸는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사항일 수도 있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들 스스로 재선이나 3선을 위한 정치 활동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예를 들면 선거철 유세장에서는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마치 일본 정치인의 망언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가 이런 상태로는 급증하는 사회적 갈등을 입법 활동을 통해 해소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민생은 국회의 주요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기 십상이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루빨리 선거 제도를 고치고 정치 자금 수수를 투명화하는 등 돈이 적게 드는 정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정치인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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