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으로 버무린 ‘음식 야화’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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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정기 간행물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도 이제 음식 이야기는 필수 메뉴가 되어버린 듯하다. ‘정력에 좋고 미용에 좋은’ 먹거리 소식과, 맛집을 찾아 경향 각지를 누비는 식도락 기행이 온-오프를 막론하고 넘쳐난다. 그러나 과유불급. 지면(혹은 화면)에 차려진 식단들이 워낙 다양하고 풍성하다 보니, 그 부박한 유행과 식탐에 벌써부터 물릴 지경이다. 언론인 홍승면, 소설가 홍성유 등이 독과점했던 1970∼1980년대의 ‘초창기’ 음식 칼럼에서 보는 것 같은 곰삭은 인정과 질박한 풍류를 요즘 글들에서는 통 맛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은행나무 펴냄)는 곡절 많은 삶 속의 먹거리 체험과, 그 속에 깃든 푸근한 인정의 기미를 맛깔나게 버무려 차려낸 한 상 같은 책이다. 상차림은 결코 그들먹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누구나 일상으로 먹는 짜장면 설렁탕 청국장 해장국 막창구이 돼지껍데기 빈대떡 칼국수 족발 갈치조림 등을, 마치 동해안 어부들이 포구에서 갓 잡은 자연산 잡어를 채썰어 초장에 비벼 먹던 한국식 막회(일본식 사시미가 아니다!)처럼 수수하게 차려낸다.

상 위에 오르는 음식은 이 책의 주인공이면서 ‘바람잡이’가 되기도 한다. 복국 이야기를 하면서 국과 탕이 어떻게 다른지 옛 문헌들을 동원해 일일이 전고를 밝히는가 하면, 홍어찜에 막걸리를 마시면서는 “황도 통조림에 막걸리!”를 외치던 소설가 고 이정환의 엽기적인 ‘안주발’을 추억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냐’라는 말로 유명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을 막판까지 본 날에는, 빈터에 얼기설기 판자로 막 지은 술집에서 막창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들이켜며 막 가는 세상을 성토하다가 마을버스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며 눙을 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다섯 편이나 들어 있는 보신탕 이야기. 유인태 현 청와대 정무수석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받던 도중 보신탕을 못 얻어먹어 한이 맺혔다든가, 6월항쟁 당시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민주화 인사들이 보신탕집을 운영했다는 ‘야사’는 아마도 이 책이 아니고서는 접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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