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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상실되는 거리

“변화에의 강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래도 한 가지 희생되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바로 기억이다. 장소와 결부된 기억이 없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없다.”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조각가) ㅣ 승인 1998.11.2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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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았던 집은, 필자가 어린 시절에 다닌 학교들이 모두 집 근처에 있어서 유난히 고향 같은 친밀감을 주던 서울 명륜동에 있었다. 그곳을 다시 떠나게 된 이유 중에는, 머지 않아 중학교에 들어가게 될 아이들 걱정도 있었다. 자식은 자갈밭에서 키워야 한다고들 하지만, 걸어서 3분 거리에 대학로를 둔 그곳이 아이들을 키우기에 적절한 자갈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집을 옮겼다면 자식을 과보호하는 나약한 부모라고 나무랄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저녁 시간에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지상에 올라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서울대학교가 있었던 그 옛날의 낭만적인 거리는 물론 아니지만, 아침 출근길에 무심히 지나 왔던 평범한 거리와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서투른 화장에 어색한 성장을 하고 삼삼오오 몰려나온 사춘기 소년 소녀들, 상대를 찾아 서로를 기웃거리면서 훑어내리는 시선들…. 필자는 그 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갑자기 이방인이 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밤이 깊어 갈수록 흥청거리는 음악 소리가 높아지고 어린 취객들이 더욱 더 흐느적거리는 그곳은 말 그대로 유흥가가 되었다.

도심 속에 자리잡은 이 거대한 오락실에는 젊은 지성이라든가 사색 같은 단어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어휘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거리를 여전히 대학로라 부르고, 때로는 문화의 거리라고 한다. 필자는 그것이 사람들의 습관과 무심함 탓이 아니라, 혹시 대학과 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도적인 야유는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이름값 할 풍경이 거의 없는 대학로

여행 온 외국인 친구에게 이 길의 이름을 설명해 본 사람은 이러한 불일치를 이해시키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이 한때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 같은 거리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문예진흥원과 미술회관, 그리고 몇 개의 소극장과 영화관이 뒷길로 밀려나 섬처럼 떠 있는 그곳에는 대학이나 문화의 거리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풍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점은 그 길의 초입에 있는 고등학교를 마주해 간신히 하나가 있을 뿐이고, 시인들이 자주 가는 찻집은 이제 그 거리의 바깥에 있다. 그들은 대학로 끝을 지나치는 혜화 고가도로 너머에 앉아서 차를 마신다. 90년대 초 인사동에 버금가는 새로운 화랑가를 형성했던 전시장들이 식당과 술집들에 자리를 내주고 떠난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이를 개탄해서는 안된다. 속마음으로라도 그래서는 안되고, 그럴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장 경제 원리에 따른 자연적인 구조 조정의 결과인 것이다. 이 절대적이고 신성한 원칙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거리는 세월과 함께 변하는 법이고, 그런 유흥의 기능, 식사와 음주와 가무의 기능은 또 이 도시의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 마침 시장의 논리에 따라 하필이면 대학로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거리에서 실현된 것일 뿐이다. 이 원칙은 명쾌하다. 화랑이나 임대 전시장들이 이 지역의 지가 상승에 따른 건물 임대료 상승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즉 그럴 만큼 자기 자본과 생산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멸은 당연하다. 이러한 변화를 인위적으로, 이를테면 정책적 지원에 의해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행위, 국제통화기금(IMF)의 제재를 받아야 마땅한 행위이다.

자생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예술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것일지라도 퇴출되고 정리되어야 한다. 문화계에서 이 일은 정부의 개입 없이도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화랑들이 인사동에서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많은 수가 문을 닫았고, 형편이 좀 나은 쪽은 사간동으로, 평창동으로, 도심 바깥 쪽으로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사동이 대학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의 강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래도 한 가지 희생되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기억이다. 그것마저 퇴출시킨다면 우리가 맞이하게 될 새 나라는 기억 상실의 나라가 될 것이다. 장소와 결부된 기억이 없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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