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머슴은 슈퍼맨?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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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주가 아니라 하녀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공주에게 필요한 것도 왕자가 아니라 머슴일 터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홍반장을 다룬 영화 <홍반장>은 머슴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원없이 충족시켜 준다.

그렇다고 이 머슴이 공주에게 무조건 굽실대는 것도 아니다. 따끔한 훈계도 하고 공주의 철없음을 귀엽게 여기는 발칙한 머슴이니 매력 또한 없지 않다. 그 공주도 결코 철딱서니 없는 공주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다소 겸연쩍은 듯한 모양새로,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성질 꼿꼿한, 관리자 눈에는 성질이 더러워보일 젊은 치과 의사 혜진(엄정화)은 망나니 환자에게 대들었다가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잘리고 만다. 어지간한 병원에는 이미 그녀의 성질머리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태. 할 수 없이 개업을 작정하지만, 대도시에서 번듯한 개업의가 되기에는 그녀의 주머니가 너무 얄팍하다.

능력 있는 여자에게 사랑받는 법

결국 그녀가 찾아든 곳은 집 마당까지 파도가 들이칠 것 같은 남도의 한적한 시골 마을. 병원 자리 알아 보는 것부터 막막한데,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들은 복덕방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홍반장’을 부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타난 우리의 홍반장(김주혁). 젊디 젊고 신수 훤한 그는 일솜씨까지 ‘수리수리 마수리’다. 너무 싸다며 투덜대는 집주인을 다독여 계약을 성사하고, 초라한 병원 터를 보고 울상짓는 철없는 혜진에게 ‘이래 뵈도 꾸며놓으면 다르다’고 부추기면서 손수 인테리어까지 해치운다. 그의 손을 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인 것이다.

그는 짜장면 배달부로, 편의점 직원으로, 택배 회사 점원으로 신출귀몰한다. 그 모든 일이 일당 5만원이다. 반나절에 끝나는 일은 2만5천원이면 해결된다. 자격증만 수십 가지. 싹싹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이 청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혜진도 불가사의다. 있는 집 딸자식이면서도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손수 학비 벌어 자립한 강단이며, 그러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적당히 철이 없어 보여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그녀야말로 슈퍼우먼이다.

그런 점에서 <홍반장>은, 욕하는 듯하지만 듣고 보면 칭찬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느끼하고 곤혹스러운 구석이 있다. 두 주인공이 너무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자고로 사람이란 속이 꽉 차야 한다는 주문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더 세게 하고 있다는 점을 여성 관객이라면 쉽게 눈치챌 것이다. ‘성질 더럽고 능력 있는 여자에게 사랑받는 법’이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하다.

<홍반장>의 두 주인공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엄정화는 여전히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를 닮았고, 어찌 보면 <싱글즈>의 동미와도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홍반장의 김주혁은 <싱글즈>에서도 튀는 언니들의 속 깊은 이성 친구였다. <홍반장>에서 그는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너끈히 짊어지고 갈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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