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삶]성교육 강사 구성애의 육담 가득한 ''아우성''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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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 교육 강사 구성애씨(42·내일여성센터 부설 성교육센터 소장). 그가 요즘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MBC 특별 기획 5부작으로 방영되는 그의 강의 <아우성>(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은 일약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왜 난데없는 성교육 열풍인가. 그의 강의를 듣다 보면 저절로 의문이 풀린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육담(肉談)을 듣다 보면 아랫도리가 스멀거릴 만도 한데 결과는 정반대이다. 두 시간에 걸친 그의 강의가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이면 청중은 오히려 ‘그래, 내가 인간이었지. 내가 이토록 귀한 존재였지’ 하는 깨달음에 목이 메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성교육은 철저하게 ‘생명’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 사랑·쾌락·생명 세 가지를 꼽는다. 이 중에서도 중심은 생명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휘파람을 휙휙 부는 남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10년 넘게 성교육 강사…한때 ‘농민운동가’로 활동

그는 남자들의 이런 태도가 여자 몸을 쾌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여자 몸이야말로 생명을 잉태할 몸이라고 생각하면, 이를 눈요깃감으로 여기는 행동은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몸이 소중한 ‘씨’를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남자라면 유흥업소나 사창가 같은 데 씨를 함부로 흘리고 다니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성교육 강의 첫 시간에 이같은 원칙을 확고하게 심어준다. 단 그는 결코 교과서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음란 영상물에 노출되어 ‘생명의 성’을 알기 전에 이미 ‘쾌락의 성’에 눈떠 버린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남자들끼리 항문 성교를 하면 즐겁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히 즐거울 수 있다’고 대답해 준다. 전립선이 받게 되는 자극을 먼저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괄약근 파손 등 항문 성교에 따른 위험을 의학적으로 설명해 준다. 여기에 그가 상담했던 사례, 곧 성인 남자에게 강간당해 괄약근이 찢어져 인공 항문을 달고 사는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덧붙여 주면 아이들은 제가 알아서 판단을 내린다.

오랜 성교육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나오기 힘든 파격적인 강의 방식이다. 대중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최근이지만 그는 벌써 10년 넘게 성교육 강사로 활동해 왔다. 사실 그의 인생이 이렇게 풀릴 줄은 그 자신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옛날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성교육 강사 구성애’가 아닌 ‘운동가 구성애’로 그를 기억한다. 그가 사회에 나와 첫발을 내디딘 분야가 농민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빠짐없이 농촌 활동에 참가했던 그는, 열악한 농촌 현실과 그보다 더 열악한 농촌 여성의 삶에 충격을 받았다. 낫으로 탯줄을 잘랐다가 파상풍에 걸린 아주머니를 보며 그는 조산원이 되어 농촌에 이바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미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그는 삶의 궤도를 일부 수정해야만 했다. 특히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남편이 부마항쟁 주동자로 찍혀 구속되면서부터는 사정이 더 나빠졌다. 생계와 옥바라지를 위해 그는 병원에 취직했다. 그는 병원에 다니던 7년 동안 아기를 3천 명 넘게 받았다. 그 경험은 오늘날 ‘생명의 성’을 역설하는 그의 강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개인 경험은 더 강렬하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던 경험을 그는 갖고 있다. 몸의 이상은 초경을 할 때부터 이미 나타났다. 한번 생리가 시작되면 6개월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수혈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산부인과를 드나들며 피임약을 먹었다.

결혼할 무렵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았더니 아기를 낳지 못할 확률이 80%로 나왔다. 그는 임신을 촉진한다는 온갖 처방을 가리지 않고 시도했다. 이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몸이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역설한다. 그렇다고 그가 성을 생명 잉태의 수단으로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체험한 ‘평생 잊지 못할’ 섹스

그는 종종 강연에서 ‘일생 동안 잊지 못할 ’ 자신의 섹스 경험을 얘기한다. 그것은 남편이 출소한 날 가졌던 잠자리이다. 남편이 부산·대전·광주 교도소를 옮겨다니는 2년 반 동안 그는 양심수 가족 투쟁의 선봉에 섰다. 한때 그를 담당하는 형사만 3명에 이를 정도로 그는 ‘악바리’로 명성을 쌓았다. 남편과 그 자신 모두 최선을 다해 산 시기였다.

그렇게 다시 만난 부부가 가진 잠자리는 무거웠다.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 갖가지 사연이 담겨 있는 성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신혼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드높은 만족감을 맛보았다. 서로에 대한 흠모와 존경이 담긴 성관계. 그 속에는 어느새 사회와 나라와 인류가 들어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과 쾌락의 성’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교육을 한다고 거창한 설교 말씀만 하기보다는 부부가 누리는 성의 기쁨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를 전제로 한 성관계. 이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는 종종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것은 동양적인 여성운동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출소한 뒤 그의 부부 생활이 늘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와 자의식이 강한 서울 여자는 생활 속에서 사사 건건 부딪쳤다(방송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결혼 전까지 그는 서울 사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벌인 사출기 사업이 망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다. 그가 조산원을 그만둔 뒤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작심하고 집을 나왔다. 노동운동가로서 새 삶을 꿈꾸며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한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생활한 1년 동안 그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삶의 전기를 맞았다. 하나는 바로 이곳에서 성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잡담처럼 들려준 낙태나 성병 얘기에 개안(開眼)했다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강단에 서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여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먼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책 구절에 감전된 듯 충격을 받은 그는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한때 빠져들었던 서양 여성운동이, 여성을 개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정과 사회로 연결된 존재임을 무시하고 ‘독립된 개체’로서의 여성만을 강조하는 이같은 운동 이론은 필연적으로 이혼과 자녀 유기를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깨달음이다.

‘아우성’ 강좌로 인해 성교육 열풍이 불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구씨는 ‘봇물이 터졌다’고 표현한다. 이제야 비로소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바른 성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세를 몰아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내일여성센터를 중심으로 유해 환경 감시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쓰레기 같은 향락·접대 문화로부터 내 아이를 지키겠다는 부성과 모성이 확장되면 한국 사회 또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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