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터내셔널> 청취기
  • 고종석 (소설가) ()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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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 초다.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하며 대학원에 다니던 그 시절, 내 가장 큰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즐거움은 ‘민중 가요’를 듣는 것이었다. 그 야만적 세월에 욕지기를 느끼면서도 사회를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볼 의지도 용기도 없던 나는 그저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노래를 남 몰래 듣는 것으로 내 겁 많은 영혼을 위로했다. 물론 그 시절에조차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러한데, 집단의 폭력에 대한 공포가 내게 거의 생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밑줄을 치며 <자본론>을 정독할 열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단적 선동성으로 가득 찬 민중 가요들을 즐겨 들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밉살맞을 만큼 모순적이었다.



그 시절 나는 몇몇 대학들 앞에 포진한 이른바 사회과학서점엘 자주 들렀다.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법으로 생산된 민중 가요 테이프들의 가장 일반적인 유통 경로가 사회과학 서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사들인 테이프가 100개는 넘는 것 같다. 음질이 그리 좋지 않았던 그 테이프들에는 일제 시대 항일 운동가들이 불렀던 혁명 가요에서부터 1970년대 말 이래 청년의 정액처럼 힘차게 솟구쳐 나온 운동 가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중 가요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학교나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그 테이프를 통해 <공장의 불빛>이나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5월> 같은 노래를 배웠다. <인터내셔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제작처가 밝혀지지 않은 한 테이프에 <인터내셔널>이 영어로 담겨 있었다.


시절 바뀐 1980년대 말부터 ‘허밍’으로 읊조려


좀더 좋은 음질로 내가 <인터내셔널>을 듣게 된 것은 1980년대 말 비디오로 본 <레드>라는 영화에서였다. 미국 저널리스트로 러시아 혁명의 참여적 관찰자가 된 존 리드의 생애를 그린 그 영화에서 1917년의 10월 혁명 장면에 당연하게도 <인터내셔널>이 삽입되었다. 이 영화 속에서, <인터내셔널>의 소박 단순한 멜로디는 화면 속의 군중 모습과 포개지며 그 선동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즈음부터 나는 술이 약간 들어가면 <인터내셔널>을 허밍으로 읊조리는 버릇이 들었다. 물론 세월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뜻이겠다. 전두환 시절 같았으면, 아무리 술이 들어가도 내 집요한 자기 검열은 그런 호사를 방해했을 것이다. 아니, 노태우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완강히 살아있었다면, <인터내셔널>을 읊조리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92년에 난생 처음 파리에 가보았다. <인터내셔널>의 고향인 그 도시에서 나는 이 노래의 프랑스어 가사를 익혔다. 그 뒤로 <인터내셔널>은 내가 애창하는 ‘샹송’ 넘버에 끼게 되었다.


1990년대의 다섯 해 동안 파리에 살면서 나는 자주 페르라셰즈 묘지에 들러 <인터내셔널> 작사자 외젠 포티에의 무덤을 찾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그 노래를 부르며 혁명이 완전히 사라져 안전해진 시대를 비겁한 역설로 구가했다.


환란의 여파로 서울에 돌아와 살며 나는 한동안 <인터내셔널>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세밑에 한 젊은 친구가 내게 새해 선물로 CD 한 장을 주었다. 그 CD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인터내셔널>로 채워져 있다. 내가 가사를 아는 프랑스어만이 아니라, 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 그리고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여러 언어들로 <인터내셔널>이 담긴 CD다. 요즘 나는 일자리에서, 잠자리에서 이 CD를 듣는다. 1980년대에 일자리에서, 잠자리에서 민중 가요 테이프를 들었듯. 나는 비록 앞으로도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일이 없겠지만, 이 노래는 내 눈길을 늘 사회적 소수파에게로 가 닿게 만들 것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린 도형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이 그 분화구 안에서 천둥친다/ 이젠 끝이 왔다/ 과거를 백지 상태로 만들자/ 노예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는 근본부터 뒤바뀌리라/ 지금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나 이제 모든 것이 될 터/ 이것은 최후의 투쟁이라네/ 단결하세 그러면 내일/ 인터내셔널이 인류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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