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해보셨습니까?
  • 함인희(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 승인 2002.09.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텔레비전 카메라가 계속해서 뻘건 흙탕물이 철철 넘쳐나는 수해 지역을 비출 때마다 더욱 목마름을 느끼던 나는 홀로 영화 <오아시스>를 보러 갔다.





영화의 주인공은 피붙이인 가족조차 애써 외면하고픈 전과자와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1급 장애인. 한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기에 잃어버릴 것 없는 이 두 사람의 사랑 앞에서, 왜 그리도 부끄럽던지…. 전과자와 장애인이라는 상황 조건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비참하면서 한없이 초라할 수도 있는 이들의 사랑이 오히려 지순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해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인물의 허위와 허세, 오기와 이기(利己)를 다루는 감독 특유의 치밀하고도 사실적인 묘사 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를 보며 부끄러워한 까닭


영화의 매력이라면, 열 사람이 함께 보면 열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폭이 된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같은 화면을 앞에 놓고도 저마다의 삶이 서러운 만큼 훌쩍이고, 떠오르는 기억이 슬픈 만큼 눈물 훔치고, 살아온 세월의 깊이만큼 공감의 울림 또한 커지지 않던가. 영화 <오아시스>를 보며 부끄러움이 깊어갔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내게는 이제 만 세 살 칠 개월 된 조카 녀석이 하나 있다. 이 녀석이 커 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간 대견한 것이 아니다. 유독 말이 빨랐던 녀석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엄마와 이야기할 때 아빠와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챘다고 한다.


처음 녀석이 수화를 배우던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아빠 사랑해요’를 수화로 가르쳐 주었더니 ‘아빠’는 그런 대로 쉽게 따라 했는데 ‘사랑해요’는 어려웠던 모양이란다. 원래 ‘사랑해요’의 수화는 주먹 쥔 왼손 위로 오른손을 올려 동그라미를 그려야 하는데, 이 녀석은 왼팔을 죽 펴더니 오른손으로 왼팔 위를 쓱쓱 문지르더라는 것이다. 말 배우기와 수화 배우기가 녀석에게는 전혀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이제 녀석은 수화를 곧잘 한다. ‘고맙습니다’도 예쁘게 하고 ‘아빠, 집에 빨리 가요’ 할 때는 표정에 간절함이 묻어나기도 한단다. 녀석이 아빠와 함께 노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아들 녀석이 아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별 불편 없이 아빠와 다정하고 평화롭게 노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의 근거 없는 편견과 변하지 않는 고정 관념이 더욱 부끄러워지면서 앞으로 녀석이 받게 될 상처가 지레 아파 오기까지 한다.


<오아시스>가 일깨워준 ‘배려’의 미덕


누군가 내게 영화 <오아시스>의 사랑이 무엇이었더냐 물어온다면, 나는 ‘배려’였다고 답해주련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배려, 상대의 처지가 되어 상대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해주는 배려, 그리고 상대를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줄 수 있는 배려가 ‘오아시스’였다고 말해주고 싶다. 영화의 백미,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된 종두가 교도소를 잠시 뛰쳐나와 공주가 무서워하던 벽면의 나뭇가지 그림자를 ‘사라지게’ 해 주는 동안 공주가 종두에게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화답하던 바로 그 장면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해줄 것 같다.


예전 종교의 자리에 이젠 사랑이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오늘날, 사랑 앞에 화려한 수식어가 늘어가면서 오히려 사랑은 삶과 괴리되어 가고, 사랑에 거는 기대가 과도해지면서 도리어 사랑은 삶을 황폐화시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럴수록 순수함으로 상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려, 성숙함으로 상대가 원하는 바를 함께 할 수 있는 배려가 그립기만한 요즈음이다.


이번 월요일 아침 뉴스를 통해 접한 <오아시스>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 소식은 그대로 청량한 한 줄기 ‘오아시스’였다. 40대 중반 감독이 던진 지극히 평범하달 수 있는 사랑의 메시지에 ‘사랑은 위험한 비즈니스’임을 절감하고 있는 세계가 흔쾌히 공감을 표시해온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