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 쿨트르이의 살인극
  • 설호정 (언론인) ()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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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 어쩌고 하는 언론의 보도를 볼 때마다 ‘분쟁’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분쟁은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팽팽한 양자 간의 다툼인데,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체첸의 상황은, 민족 문제·종교 문제 같은 복잡한 내막을 걷어내고 단순화해 이야기하면 막강한 화력의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벌이는 전쟁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남부의 돔 쿨트르이(문화의 집)라는 극장에서 평화롭게 뮤지컬을 즐기던 관객 8백여 명이 오랜 ‘분쟁 지역’인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인질이 된 날은 10월23일 밤이었다. 요구 조건은 ‘지금 당장’ 러시아군을 체첸으로부터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허망한 요구였으나, 세계인에게 잊힌 체첸이라는 산악 지방의 작은 이슬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되살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늘 평화만을 ‘수호’한다는 서방 사회의 비난이 잇따랐다는 점에서 체첸의 독립을 위한 선무에는 오히려 나쁜 영향을 끼친 비인도적인 처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사흘 남짓이 흐르고 10월26일 새벽에 러시아 특수부대원 수백 명이 극장에 들어간 지 1시간여 만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고 외신은 전했다. 자폭 폭발물을 허리에 두르고 극장의 좌석 사이에 죽어 미끄러져 있는 체첸의 여성 대원들을 포함해 인질범 32명을 전원 사살한 거야 그 특수부대원들의 임무였으니 뭐라 말을 못하겠지만,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 1백17명도 진압 과정에서 숨졌다는 소식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소식이 뒤이어 전해졌다. 인질들은 진압을 위해 군인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극장 통풍구를 통해 뿜어넣은 가스에 중독되어 숨졌고, 병원으로 후송된 인질 가운데 1백50명도 가스 중독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으며 그 중 45명쯤은 위중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 가스를 무엇인지 밝히라는 희생자·입원 환자 가족들의 거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당국은 “최악의 경우 인질 전원과 작전에 투입된 병력 등 천여명이 사망할 수도 있었다”라면서 이번 진압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만 했을 뿐 가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폐쇄된 극장 안을 대상으로 벌인 전쟁


그런 가운데 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러시아 보안군이 사용한 가스는 수면 혹은 마취 가스가 아니라 사린, VX 신경 가스나 소만 가스와 같은 신경 제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역시 이 계통은 알기도 미국이 잘 알 것인 만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 듯하다. 아무튼, 신경 가스라면 여러 해 전에 옴 진리교도들에 의해 일본 지하철역에 뿌려졌던 사린 가스 정도로 알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 막강한 살상력은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소리 없는 폭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면 이 상황은 국가 권력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폐쇄된 극장 안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산술적으로 사망자 대비 생존자가 많은 것만이 중요할 뿐, 죽음 그 자체를 막으려는 어떤 평화적인 노력도 보이지 않았던, 물리적 평정만이 목표였던 전쟁이었다. 내가 그 무도한 국가의 국민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관전’하기에는 국가 권력의 폭력이 너무나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렇게 사건의 전말을 내 나름으로 정리해 보았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들고 있다. 국가 권력의 최정상을 점거하려는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상에 돔 쿨트르이의 살인극이 오버랩되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이며, 무엇을 하려고 있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도덕성, 상대적 개혁성, 상대적, 상대적… 상대적으로 만사를 평가해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을 찍어 주어야겠지, 상대적으로 국가 권력의 폐해를 줄일 사람을 찾아 찍어 주어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진다, 하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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