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와 여장관
  • 박상기 (연세대 법대 학장) ()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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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수필을 청자 연적에 비유하면서 청자 연적의 아름다움을 ‘파격’의 미로 표현한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그 의미가 마음에 와 닫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파격의 미란 곧 창조성·독창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는 다시 파격이라는 낱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파격이란 구태를 벗어 던지는 새로운 탄생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낡은 관행과 의식을 바꾸는 파격은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구태는 지키기가 편하고, 낡은 관행과 의식은 정서에 맞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장관 인사를 파격적이라고 한 언론의 평가는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낡고 잘못된 관행과 의식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파격 인사의 핵심은 법무부·문화부·행정자치부 장관 임명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프랑스나 그리스에서 작가나 영화배우를 문화장관에 임명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가를 문화부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부처의 행정을 굳은 머리의 관료가 아닌 문화 창조의 첨병에게 맡기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실망 안겨준 토론장의 검사들



특히 법무부에 대한 서열 파괴 인사는 전국의 검사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상명하복을 조직 원칙으로 고수하던 검사들이 검찰 인사와 관련해 상관인 장관과 대통령에게 항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집단 반발을 하자 결국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통령과 검사의 공개 토론이 열렸다.



일요일 오후를 텔레비전 앞에 붙들어 놓은 공개 토론은 우리 검찰의 현주소와 검사들의 의식을 전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토론이라기보다 전투로 여겨진 이 자리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대통령은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배제된 검찰 인사를 위해 앞으로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검사들은 외견상 이를 찬성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지금까지와 같은 인사 방법을 고수해 달라고 주장했다. 물론 검찰 인사위원회의 기능을 살려 달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것은 지금과 같은 형식적 위원회라면 무의미한 주장이다.



국민들은 토론회가 열리면 그동안 집단적인 대화 시간을 많이 가졌던 젊은 검사들이 국민을 위한 검찰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숙고한 결과를 대통령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론회를 보고 난 느낌을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스러웠다. 검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개진하지 못했다. 검찰 개혁의 핵심 사항을 지적하지도 못했고, 대통령에게 예의와 품위를 지키면서 질문하지도 못했다. 마치 피의자를 수사하듯이 인신 공격적인 사실을 열거하면서 던지는 지엽적인 질문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번 검찰 인사에 대한 검사들의 반발은 법무부장관에 검사 출신이 아닌, 더군다나 젊은 여성을 임명한 서열 파괴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독일연방 법무장관 브리기테 쥐프리스는 1953년생으로서 올해 50세인 미혼 여성이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검사나 판사 생활을 한 적은 없다. 사민당 당원으로서 주로 연방이나 주 정부에서 정무 직을 맡은 경력을 갖고 있다. 장관 아래 차관 두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한 사람은 1942년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1943년생이니까 장관보다 열한 살, 열 살이 많다. 그러나 이 여성 장관은 슈뢰더 정부 각료 가운데 가장 유능한 장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연상인 남성 차관들과도 아무 문제 없이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



국민들이 사법기관을 한국 사회 최후의 개혁 대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 기관이 지금까지 국민이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검찰 개혁 의지를 비판하는 검사들의 대열에 미래의 한국 검찰을 짊어질 젊은 검사들이 앞장선 사실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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