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 개인은 어디 갔나
  • 이명호(가톨릭대 강의전임 교수·<여성과 사회> 편집 ()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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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육 현실에는 자율적 개인은 없고 조작된 게임만 있다. 대학은 개인을 집단으로 환원하는 ‘지역등급제’를 실시하고 있고, 고등학교도 내신 부풀리기로 자율성을 잃고 있다. 이 ‘거짓 게임’의 승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마디쯤 할말이 있는 분야가 교육 문제이다.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이나 학부모라면 수십 마디 말로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다 풀어내지 못할 테지만, 입시가 당장의 현안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교육은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이 묻혀 있는 지뢰밭 같은 곳이다. 최근 불거져 나온 고교등급제 파문은 이 지뢰밭에서 터진 폭발 사고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적 갈등은 대학의 자율적 선발권과 교육 평등권 사이의 충돌이라고 지적된다. 교육의 계급 재생산도 중요한 문제로 언급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안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자율적 주체 구성의 실패’라고 본다.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외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압제에 맞서 자율적 판단을 수행하는 주체의 탄생이라고 한다면, 이번 파문은 우리가 근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조차도 성취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파문에서 드러나는 것은 교육 주체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율성이라는 말에 값하는 행동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고교등급제를 실시한 대학들은 대학의 ‘자율적’ 학생선발권을 주장한다. 해당 대학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고교간 학력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 학생 개인의 능력을 재는 공정한 방식이며 이런 방식의 선택 여부는 대학의 자율권에 속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대학들은 ‘자율선발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학력 성취도와 능력을 거주 지역에 따라 판단하는 ‘지역등급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개인을 집단으로 환원하는 획일적 평가일 뿐 개체의 능력을 공정하게 변별하는 선발 방식도, 자율권 행사도 아니다. 거주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개인의 등급이 매겨지는 지역등급제는 학력등급제가 아니다. 지역등급제 속에 개인은 없다. 이 경우 개인은 자기 밖의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일 뿐 독립된 자율적 개체로 존중받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자율권과 평등권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자율권 그 자체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자율성 없기로는 일선 고등학교들도 마찬가지다. 고교 관행으로 자리 잡은 내신 부풀리기는 학교와 교사들의 자율적 판단이 부재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물론 거기에는 대학측의 은밀한 등급제 실시에 맞서기 위한 방어적 행위라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전교생의 70% 이상이 ‘수’를 맞고 담임교사들의 학생생활 평가가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고 만 것은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서 합리적 판단을 수행하는 주체로 서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자기소개서에도 ‘자기’는 없다

성적의 집단적 상향 조정이 이루어지고 교사의 평가가 신뢰를 잃어버릴 때, 그런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자율성 훈련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자기소개서조차도 가짜로 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가짜 게임에 일찍부터 길든 아이들에게 자기소개서란 자신을 정직하게 알리는 글쓰기라기보다 부풀려진 광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표현하고 그것으로 평가받는 자기소개서에 ‘자기는 없다.’

사설 학원들이 자기소개서 대필 작업까지 해주는 현실을 보고 있자면 다른 영역도 아닌 ‘교육’의 영역에서 이처럼 가짜 게임이 판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학생·교사·학부모·대학·사회·정부가 마치 공모자들처럼 그 현실을 묵인하는 나라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는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그 나라에는 자율적 개인은 없고 조작의 게임만 있다.

자율적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자율적 개인들이고, 그 개인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다. 하지만 인생의 출발 지점에서부터 이미 거짓 자아를 배워버린 아이들을 양산하면서도 우리는 ‘자율성’을 말하는 거짓 게임을 연출하고 있다. 이 게임의 승자는 누구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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