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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심정은 알겠지만…

“불문법 사상 덕분에 바야흐로 선출되지도 않은 영감들이, 씌어지지도 않은 헌법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사법 독재가 시작될까?

진중권(문화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ㅣ 승인 2004.11.02(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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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이 화가 났다. 그 분노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이번 헌재의 판결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법적 해프닝이었다. 특히 헌재 결정문은 고교생 논술 답안지 수준의 한심한 내용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게 60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사법의 수준이다.

도올은 ‘헌법 재판소를 해체’하자고 촉구한다. 하긴 근엄하게 이런 수준 낮은 코미디나 하는 게 헌재의 일이라면, 헌법재판소 자리에 차라리 법복 입은 침팬지 우리를 갖다 놓는 게 더 합리적이리라. 비싼 봉급 줘가며 수준 낮은 코미디를 보느니, 바나나 몇 개로 더 많은 웃음을 웃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도올의 이 말이 분노의 억양법이 아니라 진지한 직설법이라면, 그때는 좀 문제가 된다. 헌재가 잘못 운영된다고 제도 자체를 폐기하는 게 과연 합당할까?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격한 표현을 쓰는 것은 좋으나, 이런 문제를 논할 때에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난 탄핵 파동 때에 도올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운명이 몇몇 재판관의 손에 달린 사태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려고 그는 성문 헌법에 대한 불문 헌법의 근원적 우위를 역설했다. 그때 나는 이 논리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가, 그만 ‘분위기 썰렁 죄’에 걸려 노란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내가 지적한 위험이 이번에 현실로 나타났다. 이번 헌재의 판결은 불문 헌법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헌재 공격 논리, 부메랑 되어 돌아와

헌재 결정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헌법에 ‘행정수도는 반드시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음을 알았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별 잡음 없이 통과된 것을 보니, 나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이 사실을 몰랐음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헌재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행정수도=서울’이어야 한다는 게 만인이 공유한 관습적 동의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개그가 졸지에 헌법이, 불문 헌법이 되어버렸다.

헌재가 한 일은 국민투표도 거치지 않고 이제까지 없던 헌법을, 불문(不文)으로 제정한 것이다. 도올은 헌재를 공격하던 자신의 논리를, 하필 헌재가 실천에 써먹은 데에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불문 헌법을 들먹거리려면 그 소이연은 우리 사회를 법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근원적 인도주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이는 도올의 주관적 가치관의 표명일 뿐, 이것으로 헌재와 도올의 불문법 사상을 구별할 수 있을 같지는 않다. 왜? 헌재도 자신들의 결정이 ‘근원적 인도주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좌익이 헌법의 밖에서 혁명의 자연권을 주장한다면, 우익에서는 헌법의 밖에서 쿠데타의 자연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 상식을 순진한 도올은 몰랐던 것 같다. 아니면 애초에 논리적 정합성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든지….

도올의 ‘민중의 함성’이든, 헌재의 ‘관습법’이든, 매우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여당이 마련한 개혁 입법 모두를 헌재로 가져갈 작정이란다. 성매매 업주들은 성매매도 관습법으로 인정해 달라고 달려들고, 성균관 유림들은 호주제를 관습법으로 인정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낼 태세다. 헌재의 육갑에 나라 전체가 코미디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문법 사상 덕분에 바야흐로 선출되지도 않은 영감들이, 씌어지지도 않은 헌법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사법 독재가 시작될까? 그 날이 오면 ‘민중의 함성’을 얘기하던 도올의 주장이 뒤늦게 정당성을 얻게 된다. 왜? ‘관습법’의 우익 쿠데타(?)가 정당하다면, ‘민중의 함성’이라는 좌익 혁명(?)도 정의로울 테니까. 풋, 그날이 오면 나도 거리로 나가 민중의 함성을 질러야지. “헌재를 타도하고, 헌법 재판관도 선거로 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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