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몰라요
  • 이명호(가톨릭대 강의전임 교수·<여성과 사회> 편집 ()
  • 승인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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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시련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시련이 도를 넘는 것일 때 아이들은 부서진다. 아이들이 도덕성의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른 사회의 위선이다.”
대한민국의 아킬레스건 하나가 터졌다. 수능 시험이라는 우리 사회의 연례 의식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구멍을 뚫은 것은 광주의 아이들이다. 휴대전화라는 모바일 기기를 동원하여 총 규모 1백80명이 넘는 수험생·졸업생·재학생 들이 벌인 이 부정 행위는 그 조직성과 대담성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아이들은 ‘속여먹기’라는 변칙적 방법을 통해 국가 시험 제도에 구멍을 내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온 우리들의 의식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초겨울 바람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장기 아이들이 보인 도덕성의 파탄 때문이다. 부정(不正)과 변칙에 대한 거부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큰 목표이다. 이 공민(公民)적 능력을 체득해야 할 아이들이 부정과 변칙의 고도 기술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해도 한참 슬프게 한다. 인생 출발선에서부터 망가진 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그러자면 그들이 통과해야 할 고통과 자학의 터널이 또 얼마나 길고 어두운 것일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황량해진다.

체제의 뒤통수 후려친 영악한 약자들

사실 대한민국이 부정 공화국으로 낙인 찍힌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 상당수 주역들이 젊은 학생들이라는 사실이다. 토플이나 토익 같은 국제 시험에서 한국 학생들이 받는 성적이 의혹의 대상이 된 지는 오래이고, 한국의 유학 지망자들이 외국 대학에 보내는 자기소개서가 그 진실성을 의심받게 된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경쟁의 대전제는 공정성과 정직성이다. 이 전제를 망각한 ‘경쟁력’은 이미 경쟁력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경쟁력은 국제 수준의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이번의 수능 부정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10대 학생들의 도덕적 파탄이라는 문제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망가져 있다면, 이 망가짐은 아이들 탓이기만 한가? 그들의 도덕적 성숙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구조·환경을 우리가 제공한 것은 아닌가? 어른 사회가 반성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시민적 가치를 배우고 인격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끝없는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모두가 1등 하기를 강권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치팅(cheating)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성적보다 더 중요한 어떤 가치를 위해 부정 수단을 거부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가 되면 시련은 더 커지고, 정직성을 내세우다가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 찍힐 위험에 생각이 미치면 시련은 절정에 달한다. 어른들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은 극심한 도덕적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커닝’은 이런 시험대에 오른 아이들이 선택하는 변칙적 생존 전략이다.

성장은 시련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시련이 도를 넘는 것일 때 아이들은 부서진다. 아이들이 도덕성의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른 사회의 위선이다. 광주의 아이들은 이 위선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것을 교묘히 이용한 속임수꾼들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체제에 맞서 체제의 뒤통수를 후려친 영악한 약자들이다.

“나는 나를 심판할 내 나름의 법과 법정을 가지고 있다.” 근대의 시작 지점에서 몽테뉴가 던진 이 말은 개인의 자율성과 진정성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담고 있다. 통속적 이해 관계와 외부 압력에 맞서 개인 주체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근대 교육의 목표이자 근대 시민 사회 형성의 필수 조건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자기 나름의 법과 법정을 갖지 못하도록 만든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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