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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는 왜 꽁지머리 잘랐나

월드컵 악몽 이어 K리그에서도 부진…‘대표 골키퍼’ 명예 되찾기 몸부림

손장환(<중앙일보>체육부 차장) ㅣ 승인 2003.05.01(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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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머리’ 김병지(33·포항 스틸러스)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꽁지머리를 잘랐다. 삭발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과거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과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실연했을 때 머리를 깎는 행위나 속세를 떠나는 징표로써 삭발하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김병지의 삭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확히 2001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수문장은 ‘당연히’ 김병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오기 전까지 김병지는 한국 축구의 대표 골키퍼였다. 100m를 11초대에 뛰는 스피드에 뛰어난 점프력, 위기 때 과감하게 뛰쳐나오는 순발력 등 1급 골키퍼로서 가져야 할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비록 네덜란드에 다섯 골이나 먹는 수모를 당했지만, 세 게임 모두 전시간 출장하면서 주전 골키퍼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국내 프로축구에서도 평균 0점대나 1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자랑했다. 쇼맨십도 대단해서 공을 몰고 하프라인까지 나가 관중을 즐겁게 해주는가 하면, 마지막 공격 때 최전방까지 나와 헤딩골을 넣기도 해 ‘골 넣는 골키퍼’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꽁지를 묶은 데다 푸른색·빨간색 등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패션 감각을 뽐내며 ‘진정한 프로 선수’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오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히딩크 감독이 보기에 김병지는 ‘어설프게 튀는 선수’였다.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을 하나하나 파악하던 취임 초반, 김병지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평가전 때 평소처럼 공을 몰고 나오다 상대방에게 뺏겨 실점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김병지를 대표팀에서 제외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기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축구인까지 김병지에게 자극을 주려는 히딩크 감독의 ‘충격 요법’으로만 받아들였다. 아마 김병지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병지 없는 한국 축구’를 생각하기 힘들 때였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김병지는 다시 대표팀에 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히딩크 감독의 마음에는 이운재가 들어앉아 있었다. 별로 말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이운재의 스타일이 히딩크 감독의 마음에 든 것이다. 수비가 안정되어야 전체적인 팀 플레이가 이루어진다는 판단에서 어딘지 불안한 김병지보다는 이운재에개 점수를 더 준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는 이운재였다. 이운재는 여러 모로 김병지와 대조되는 선수다. 빠르지도 않고 순발력도 떨어진다. 한때 몸무게가 100kg이 넘어 둔한 이미지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살도 빼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듬직한 골키퍼로 거듭났다. 튀지는 않지만 매우 안정된 골키퍼다. 바로 그런 점에서 히딩크 감독과 ‘궁합’이 맞았다. 김병지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감격을 내내 벤치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전게임, 전시간을 이운재가 책임졌다. 더구나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이운재가 승부차기를 막아내 4강 진출의 일등 공신이 되면서 야신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자존심 강한 김병지로서는 기쁨과 질투가 함께 어우러졌을 것이다.

월드컵이 끝났다. 사상 최초의 월드컵 4강이라는 과실을 나누는 시간이 왔다.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에게는 거액의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축구협회의 방침은 선수를 A·B·C 세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지급하는 것이었다. A등급은 주전 선수, B등급은 교체 선수, C등급은 교체로도 뛰지 않은 벤치 멤버이다.

후보 선수들은 반발했다. ‘모든 선수가 4강 진출의 공헌자이므로 똑같이 지급해야 한다’는 여론도 등등했다. 박지성·이영표·홍명보 등 일등 공신들도 인터뷰에서 “모든 선수에게 똑같이 보너스를 주지 않으면 우리도 받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결국 모든 선수에게 똑같이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 배후에 김병지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 1분도 뛰지 않아 C등급이 된 김병지가 후배들을 부추겨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김병지로서는 실리는 챙겼지만 월드컵은 여러 가지로 체면을 손상시킨 대회였다.

월드컵의 아픈 상처를 안고 국내 프로 리그인 K리그에 돌아온 김병지에게 시련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올 시즌 개막전에서 김병지는 무려 네 골을 내주더니, 3게임에서 연속 실점하며 일곱 골을 먹는 창피를 당했다. 급기야 팀 주전에서도 빠지는 수모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장황하지만 이것이 김병지가 꽁지머리를 자르게 된 이유다. 불과 2년 전까지 부동의 국가 대표 골키퍼였던 그가 팀에서도 후보로 밀려난 것은 슬럼프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주위에서는 김병지가 아직도 월드컵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김병지는 머리를 잘랐다. 여기서 끝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지난 4월12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 다시 주전으로 출전했다. 바로 이운재와의 맞대결이었다. 그리고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한 경기로 슬럼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병지의 가치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자질로 볼 때 그만한 골키퍼를 찾기는 힘들다. 올해로 서른세 살. 언뜻 보면 나이가 많은 것 같지만 골키퍼는 40대까지도 뛸 수 있다. 안양 LG의 신의손은 김병지보다 열 살이나 많지만 아직도 훌륭한 골키퍼다. 한국 축구의 ‘대표 골키퍼’ 김병지가 빨리 월드컵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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