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세상에서도 연필은 죽지않는다
  • 김상현 ()
  • 승인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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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친환경성·싼값 덕에 매출 오히려 늘어
컴퓨터와 연필, 또는 인터넷과 연필. 마치 우주왕복선과 돌도끼를 한데 묶은 것처럼 생뚱맞게 들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조금만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보자. 혹시 우리가 정보 통신 시대의 원조를 간과하거나, 심지어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컴퓨터 시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필은 워드 프로세서이자 그래픽 프로그램이다. 그러면서도 전원(電源)이나 메모리가 필요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첨단이다. 100V냐 220V냐에 연연할 일이 없고, 해외에 나가 같은 모양의 플러그를 찾느라 애면글면할 일도 없으며, ‘메모리 용량이 부족하니 256MB나 512MB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따위의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철자 교정 프로그램이 없다거나 네트워크가 안된다는 점에서는 다시 구식으로 돌아가지만, 엄청나게 싼값을 생각하면 전혀 대수로울 것이 없다.

나무로 흑연(연필심)을 두른 연필은 4백년 넘게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심지어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용 디지털 단말기(PDA)가 생활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지금까지도 연필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18개월마다 처리 속도가 2배로 빨라진다는 최첨단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기세도, 20세기를 뜨겁게 달군 닷컴 붐과 그 몰락의 충격파도 연필의 생명력을 꺾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연필은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선진국들이 많은, 따라서 정보화 수준이 높은 유럽의 경우에도 연 12%라는 높은 증가율(2002년)을 보였다. 유럽필기구제조업협회는 개발 도상국의 연필 수요는 그보다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컴퓨터 붐을 선도한다는 미국에서도 연필 시장은 연간 2억2천만 달러(약 2천6백억원)에 이른다. 조사 기관인 A.C. 닐슨은 2002년 미국의 연필 수입 규모가 1996년보다 3배 더 늘었다고 밝혔다.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밀물처럼 들어온 싸구려 제품이다.

적어도 숫자로만 비교한다면 연필은 여전히 개인용 컴퓨터(PC)보다 힘이 세다. 지난해 전세계의 PC 판매량은 약 1억4천만 대로 추정되는데, 연필은 10억 개 이상 팔렸다. 지난 10여 년 간의 누적 판매량으로 따지면 손쉽게 100억 단위를 넘어선다. 그 숫자만으로도 연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널리 애용된, 필기구 분야에서 금메달감이다.
손바닥만한 팜톱과 PDA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연필만큼 편리하자면 아직 멀었다’고 미국연필수집가협회의 뉴스레터 편집자인 더그 마틴은 잘라 말한다. 이 협회는 연필의 가치와 편리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두 가지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연필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닌가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라고 파버-카스텔 사의 안톤-볼프강 폰 파버 카스텔 백작(61)은 회고한다.

1761년 캐비닛 제조업자인 카스파르 파버가 독일 뉘렘베르크에 설립한 파버-카스텔 사는 전세계 15개 공장에 5천여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최고(最古)의 필기구 제조 회사이다. 이 회사는 연필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 20년 전 컴퓨터 필기구나 디지털 펜 따위로 사업 품목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변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쯤 파산했을 것이다.

설립자의 8대 손인 파버-카스텔 백작은 1978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뛰어난 경영 수완과 적극적인 연구·개발 투자로 회사의 성공을 주도하며 ‘연필계의 빌 게이츠’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특히 나무 연필 기술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그립 2001’은 2년여 동안 두 자릿수의 고성장을 일군 효자 제품이다. 치밀한 인체 공학 기술이 돋보이는 그립 2001은 여느 연필과 달리 육각형이 아니라 삼각형이며 손으로 잡는 부분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붙어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돌기들이 고무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연필 표면에 흔히 쓰이는 무독성 페인트여서 여느 연필처럼 손쉽게 깎인다는 점이다. 그립 2001은 이처럼 남다른 아이디어와 신기술로 국제 규모의 디자인상을 다섯 개나 휩쓸었다.

그러나 파버-카스텔 사가 늘 성공의 단맛만 본 것은 아니다.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혜성처럼 등장했던 1970년대에는 계산자 비즈니스가 된서리를 맞아 큰 폭의 적자를 보기도 했다. 1970년대의 불운은 10년 뒤 다시 행운으로 바뀌었다. 당대를 풍미한 생태 운동 덕택이었다.

연필은 현존하는 필기구 가운데 가장 값싸다. 그에 대적할 만한 필기구가 없다. 만년필이나 볼펜처럼 잉크가 마를 일도 없으며, PC처럼 파란 화면에 치명적 오류 어쩌고 하며 다운될 일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연필은 깊고 깊은 물 속은 물론 지구 밖 우주 공간에 나가서도 문제 없이 쓸 수 있다. 보존 연한도 길어서, 연필로 쓴 글은 성격이 비슷한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쓴 글이나 그림보다 더 오랫동안 변치 않는다. 컴퓨터가 불과 10년도 안된 플로피디스크의 자료를 읽지 못하는 것과 여간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첨단으로 치달을수록,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찬가가 드높아질수록 연필의 의미는 도리어 더 커지는 것 같다. 노란색 No.2 연필이 기술 진보의 숨가쁜 가속도에 대항하는 한 상징으로 부각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기의 문화적 부작용을 염려하는 일군의 작가·사상가·건축가·음악가 들이 이 노란색 연필을 치켜들고 있다.

‘레다이트들이여 단결하라!’고 미국 뉴욕에 있는 연필클럽은 간곡한 어조로 동조자들을 끌어 모은다. 레다이트(Leadites)는 연필심을 뜻하는 lead에 사람을 뜻하는 어미 -ite를 더한 신조어이다. 기계화·자동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일컫는 러다이트(Luddites)와도 공명을 이룬다.
1993년 출판업자인 빌 헨더슨에 의해 설립된 연필클럽은 전자 기기들의 범람이 몰윤리, 몰지각, 극한적 상업주의를 초래하고, 마침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눈빛이 흐리멍덩한 영혼 없는 백치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개탄한다고 선언한다. 흔히 가상 현실이라고 불리는 컴퓨터와 전자 기기의 여러 감각적 경험이 특히 젊은 세대의 문장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연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필 헨더슨의 대답은 ‘단순함’이다. 일반의 상식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전기가 필요치 않고 값도 싸다. 손으로 연필을 잡고 종이 위에 글을 쓸 때, 그것은 곧바로 당신 자신의 선명한 흔적이자 아이덴티티가 된다. 이것이 우리를 몇 개의 글자꼴(폰트)로 축소해 버리는 컴퓨터와 다른 점이다.

이쯤 되고 보면 연필의 열혈 팬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 않다. 예컨대 존 스타인벡·귄터 그라스·아치볼드 매클리시 같은 당대의 소설가들은 종이 위에 연필로 사각거리며 글을 써 내려가는 행위의 각별한 느낌과 의미에 매료되어, 연필이 종이 위에 남기는 대담한 필치나 옅은 흔적들의 풍부한 표현 효과를 찬양하기도 했다.

연필클럽 회원에는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 팔리 모왓도 들어 있다. 그는 자신의 남다른 연필 사랑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연필로 (글을) 쓰기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연필을 씹고, 연필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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