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맹자>도 모르면서…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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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도 공교육 붕괴…정치 논리 휘말려 과거 제도 파행 잇따라
해마다 수능 시험이 끝나면 뒤따르는 소식이 있다. 무슨 공부를 해서 고득점을 올렸다는. 과거 시험을 보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땠을까?

옛날 선비들도 요즘 수험생들이 족집게 과외를 받듯 일종의 과거 예상문제집인 <초집>을 가지고 공부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사헌부가 ‘온 나라 자제들이 <초집>만을 과거 공부의 좋은 수단으로 여기는 경박한 풍습이 굳어져 이제는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막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상소한 기록이 나와 있다.

과거 시험 위주로 학문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시대에도 공교육이 심각하게 붕괴되었다. <명종실록>을 보면 대사헌 김귀언이 ‘성균관은 인재를 교육하는 데 관계된 곳인데, 선생들이 늙고 병든 사람이 아니면 거의 다 인망이 없는 사람들로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유생들이 기피한다’라고 상소했다.

조선시대에도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우위를 차지했다. <중종실록>을 보면 윤은보가 왕에게 “유생들이 성균관에 모여 학업을 연마하지 아니하고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사사로이 집에서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성균관이 과거 시험에 도움을 주지 못하자 유생 숫자가 2백명에서 30명으로까지 줄었다.

식년시 남발되면서 선비들 학력 저하

조선시대에도 교육 정책이 정치 논리에 좌우되면서 갖가지 폐단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별시 남발이다.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달리 별시는 왕이 즉위한 원년이나 나라와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치러졌는데, 후기로 갈수록 민심수습책으로 남발되었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식년시와 달리 별시는 한 번 시험에서 한 문제만 잘 풀면 합격이 가능해 선비들의 학력 저하를 초래했다. <성종실록>을 보면 대사간 김수녕이 “오늘날 선비들은 대부분 경서를 통하지 못한다. <논어> <맹자>의 첫 부분조차 해석하지 못하니 그 나머지는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탄한 내용이 나온다.

당쟁이 극심할 때는 각 정파가 세 불리기를 위해 과거를 이용하면서 입시 부정이 극성이었다. 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거나, 남의 글을 빌리거나, 대리 시험을 치거나, 답안지 주인을 알아보게 하거나, 답안을 고치는 등 갖은 부정 행위가 펼쳐졌다.

부정 행위의 압권은 성균관 안팎을 연결한 죽통에 새끼줄을 넣어 밖에서 작성한 답안지를 안으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면 권문세가의 자제는 아예 글씨를 대신 써 줄 사람, 책을 가지고 따라 가는 사람, 먹을 것과 자리를 가지고 따라 가는 사람 등 시종 10여명을 데리고 시험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와 현행 입시 제도를 비교해 <과거 공부를 알아야 우리 교육이 보인다>라는 책을 쓴 이원재 교수(연세대·교육학과)는 “과거 제도나 입시 제도나 시험에 대한 맹신이 문제다. 합격자가 모든 것을 얻고 불합격자는 모든 것을 잃고 박탈감에 시달려야 하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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