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금메달 뒤에 스포츠과학 있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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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올림픽은 첨단과학의 각축장…‘깃털 신발’ ‘뉴 슈퍼바이크’ 등 신제품 선보여
‘총알 탄 사나이’ 모리스 그린은 시드니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서 1위로 골인하자 신발을 벗어 번쩍 치켜들었다. 수영 남자 배영 100m 경기에서 도미니코 파오라반티가 금메달을 확정할 때, 전세계 관중의 눈은 그의 전신 수영복에 쏠렸다.

시드니올림픽은 인간 한계의 경쟁을 뛰어넘는 스포츠 과학의 싸움터였다. 0.01초의 승부를 가르고,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를 연출한 금메달리스트의 뒤에는 과학 기술의 힘이 있었다.

모리스 그린의 신발은 세라믹·알루미늄 합금·탄소섬유를 조합해 개발한 ‘첨단 과학의 창조물’이다. 앞굽과 중간에 박힌 스파이크를 10개에서 8개로 줄였고, 탄소섬유는 트랙을 밟을 때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전 신발보다 25g을 더 줄여 무게가 1백96g인 이 신발은 같은 조건에서 5cm(100m기준)를 단축할 수 있다. ‘황금빛 깃털 신발’을 신은 그린은 경쟁자를 0.12초 차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매리언 존스는 100m 경기용과 200m 경기용 신발을 따로 맞추었다. 그녀는 두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다. 34위에 머무른 한국 여자 마라톤 오미자 선수는 시합을 마친 후 발에 물집이 생겨 아프다고 호소했다. 신발이 꼭 맞지 않아 신발 안에서 발이 겉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사용했고, 물집의 고통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0.1초 차이로 승부가 나는 육상에서는 선수복의 과학성도 중요하다. 육상 400m에서 우승한 캐시 프리먼은 속도복을 입고 출전했다. 미세 섬유로 구성된 천이 선수의 근육 온도를 적절히 유지시키고, 공기 저항을 줄여 단 0.001초라도 단축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선수복이 가장 큰 파란을 일으킨 종목은 단연 수영이다. 수영에서 무려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를 거머쥔 호주의 이언 소프,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파오라반티 등이 입었던 전신 수영복은 테프론이 코팅된 라이크라 소재이다. 사람의 피부보다 매끄럽고 팽팽한 재질이 전신을 압박함으로써 물의 저항을 줄여준다. 넓적다리와 팔의 상부를 꼭 감싸서 근육의 떨림을 막고 피로를 덜어주는 장점도 갖고 있다.

‘인간 새’가 되어 조금이라도 더 높이 뛰어올라야 하는 장대높이뛰기에서는 무엇보다 과학적인 장비가 중요하다. 선수의 기술보다 장비의 우수성이 신기록을 낳는 결정적인 산파 역할을 했던 종목이다. 장대의 재질이 탁월한 탄력성을 가진 섬유유리로 교체되면서 최고 기록이 2m나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에서는 섬유유리 장대를 능가하는 새로운 장비가 등장하지 않아서인지, 신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선수의 체력이나 기술 못지 않게 장비가 중요시되는 또 다른 종목은 사이클. 공기 저항을 줄이는 선수복과 사이클은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사이클 경기에서 공기 저항은 무시 못할 장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때마다 공기 저항을 줄인 신형 사이클이 등장해서 화제가 되곤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인간 승리의 대명사’ 랜스 암스트롱이 공기 저항을 크게 줄인 새로운 형태의 프레임과 실크 타이어를 채택한 ‘뉴슈퍼바이크’를 타고 사이클 개인도로에 출전했다. 그러나 ‘첨단 사이클’도 암 투병으로 지친 그의 체력을 보완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는지, 그는 13위에 그치고 말았다.

금메달을 겨냥한 과학 기술의 활약은 비단 첨단 장비에 국한하지 않는다. 새로운 운동 기술이나 훈련 방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과학은 든든한 버팀대가 된다. 여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다카하시 나오코의 비결은 ‘트로트 주법’에 있었다.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보폭을 짧게 해 체력 소모를 극도로 줄인 이 주법은 운동 역학과 생리학 연구의 산물이었다. 이언 소프가 시드니올림픽의 화려한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인체 역학적 연구에 따른 독특한 영법의 힘이 크다. 이언 소프는 발차기 속도가 보통 선수의 3배나 빠르며, 양팔은 매우 느린 속도로 풍차처럼 회전한다. 느린 영법이 속도 개선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인체역학적 연구에 따라 채택된 기술이다.
‘시드니의 신데렐라’ 강초현 선수를 배출한 한국 사격선수단은 ‘스캣(scatt)’이라는 사격 훈련 시스템을 이용해 과학적인 훈련을 받았다. 스캣은 격발 시점을 중심으로 총구의 움직임을 컴퓨터 스크린에 나타내는 장치. 이 장치를 통해 선수의 상태를 분석할 수 있다. 총구가 위아래로 많이 움직이면 호흡이 불안한 것이고,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면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증거이다. 강초현 선수가 과녁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훈련 시스템의 도움이 컸다.

난이도 높은 동작을 실수 없이 조화시켜 연기해야 하는 체조 훈련에도 과학은 한 몫 거든다. 평행봉의 간판 스타 이주형이 은메달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비디오 분석 시스템과 컴퓨터를 이용한 영상 분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행봉에서 메달을 거머쥐려면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모리수에 파이크트 동작을 깔끔하게 연기해야 한다. 평행봉에서 뒤공중 두바퀴를 돌아 팔을 걸치는 이 연기를 이주형 선수는 매끄럽게 하지 못했고, 동작도 작은 편이었다. 올림픽에 대비해 동작을 초당 60장 정도로 촬영하여 분석했고, 이주형 선수는 분석 결과에 따라 자세와 동작을 개선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태권도 역시 첨단 분석기기를 이용해 훈련을 거듭했다. 발차기에 이용되는 주근육을 파악하여 강화하는 방법, 발차기의 위력과 직결되는 동작의 효과 등을 연구해서 개선했다. 그 수확은 정재은이 첫 금메달을 따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심리 훈련 또한 필수다. 여기에도 스포츠 과학이 깊이 관여한다. 한국 양궁이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4연패를 이룬 비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심리 분석을 통한 ‘과학적인 안배’에 있었다. 한국팀의 단체전 전략은 1, 2라운드는 김수녕-윤미진-김남순, 3라운드는 김남순-윤미진-김수녕 순서였다. 노련한 김수녕이 초반 리드를 이끌고 후반 박빙의 승부에서 흔들림 없이 제 몫을 해내리라는 컴퓨터 분석에서 나온 결과였다. 막내 윤미진은 상황에 따른 동요가 심한 편이어서 부담이 없는 중간에 넣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이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통해 얻어낸 이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 한국 단체전의 전략이 수립되었고, 한국 여자 양궁은 4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펜싱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김영호는‘14점 징크스’가 늘 걸림돌이었다. 이전까지의 국제 대회에서 김영호는 14―14 동점까지 몰리면 평정을 잃고 번번이 점수를 내주곤 했던 것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체육과학연구원은 김영호의 심리를 테스트해서 동점 상황에서도 심리전에 밀리지 않는 훈련을 거듭했다.

영국의 생화학자 가이 브라운 교수는 과학 주간지 <더 사이언스> 최근호에서 ‘운동선수들의 기록 향상은 철저히 과학 기술의 성과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체육과학연구원 문영진 박사도 “과학 기술의 진보가 올림픽 메달을 결정하는 현상은 앞으로 더욱 더 가속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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