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문제 해결사’ 한재용씨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1999.01.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실 공사 끝까지 추적‘편안한 마을’ 만든다
한재용씨(50·광주시 봉선동 무등파크 1차 아파트 1동 1407호)가 수첩에 늘 넣어가지고 다니는 명함은 두 가지다. 전국아파트연합회 광주·전남지부 총무이사. 국립농산물검사소 호남지소 나주출장소 품질관리계장.

한재용씨는 광주 지역 건설업체나 주택관리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부실 공사나 하자가 없다고 둘러대던 시공업자들도 한씨가 제시한 아파트 현장 조사 결과를 보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한씨는 회계 장부나 용역 계약서만 훑어보아도 아파트 관리소장이나 입주자 대표회의 간부 들이 시공 회사와 결탁했는지, 또 관리비를 얼마나 횡령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아파트 문제에 관한 한 손꼽히는 전문가다. 주택건설촉진법이나 공동주택관리령을 훤히 꿰고 있기 때문에 시청의 주택 관련 공무원조차 한씨에게 자문하기 일쑤이다.

전남 보성 득량 출신인 한재용씨는 67년, 당시에는 들어가기 어렵다는 국립농산물검사소 공채 시험에서 100 대 1 경쟁을 뚫고 합격해 공직 생활에 발을 들여놓았다. 평범한 공직자로 생활하던 한씨가 직업과 전혀 관계 없는 아파트 운동에 뛰어든 것은 91년. 32평형 아파트가 당첨되어 결혼 23년 만에 내집을 마련했지만, 돈이 모자라 중도금 납입 날짜를 어기는 바람에 19나 되는 연체료를 물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입주일을 맞았지만, 시공 회사가 차일피일 입주일을 어겨 옮길 집도 없이 전세집을 비워 주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입주자가 돈을 늦게 내면 고액 연체료를 물어야 하지만, 시공 회사는 준공일을 어기고 입주일을 미루어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한씨는 시공 회사의 횡포에 맞서기 시작했다. ‘가족 납치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리기도

때마침 92년 광주 지역에서는 부실 아파트 하자 보수 문제로 연일 집단 시위가 벌어졌다. 한씨는 소모적이고 실익이 없는 항의 집회 대신, 현장 조사를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전국 최초로 광주 지역 18개소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들과 함께 92년 2월 광주공동주택연합회(연합회·회장 강인태)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광주 YMCA·광주경실련과 공동으로 부실·하자 보수 등 민원을 접수한 뒤 현장 조사를 벌여, 건설업체들로부터 하자 보수비 6백80억원을 받아냈다.

성과는 컸지만 그 때문에 한씨가 받은 불이익도 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공업자들의 협박 전화가 걸려 왔고, ‘가만두지 않겠다. 가족을 납치하겠다’는 공갈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의 아내 김경숙씨(47)는 협박 전화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렸고 심장병까지 얻었다. 두 딸 유미(21)와 유리(20)도 마음 고생이 심했다.

한씨는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당했다. 지난해 12월 아파트 동대표나 입주자대표회 회장은 공무원 겸직 불가 대상이 아니라는 유권 해석이 내려졌지만, 그 전까지 한씨는 무등파크 아파트 입주자대표회 회장과 광주·전남 아파트연합회 총무이사를 겸직했다는 이유로 좌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상사의 질책을 받았을 때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었으면 두었지 연합회 일은 계속하겠다고 맞섰다. 동료들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말렸지만, 부정과 비리를 없애는 일이므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한재용씨의 말이다. “건설업자로부터 단 한푼이라도 받았더라면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한씨는, 이런 사회 활동을 인정받아 96년 농산물검사소 호남지사장 추천으로 광주 시민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올해로 공직생활 31년째를 맞은 한씨는 만년 계장이지만 아파트 운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문 분야인 농산물 품질 관리 부문에서도 지역에서 1인자를 자부하는 베테랑이다. 불법 유통되는 가짜 농산물을 단속하고, 생산 농가에 농산물 품질 인증제를 정착시키는 것이 한씨의 주된 업무. 지난해 그가 적발한 ‘가짜 나주배’ 적발만 7건. 농산물 유통과 관련한 성과로 농협중앙회장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아파트 문제 해결사로 명성이 높아지자 한씨의 휴대폰은 밤낮없이 울리고 있다. 대부분 입주자 대표회의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부실 시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묻는 전화다. 요즈음에는 임대 아파트 임대료 인상에 대한 대처 방법과 입주자 대표회의 구성 가능성을 묻는 전화가 많다. 특히 경제난 이후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주부들이 늘면서 한씨는 전문 상담가가 되어 버렸다. 휴대폰 통화료까지 합치면, 그의 한달 전화료는 15만원이 넘는다.

한씨는 벌써 7년째 격월간으로 <전국공동주택 연합회보>를 혼자 제작·발간해 전국 지부에 발송하고 있다. 회보 제작은 열흘 가까이 밤을 새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47호까지 발행된 이 회보에는 공동주택관리령 등 아파트 문제의 최근 동향이나 보도 자료, 관리소 인건비 및 용역비 실태 조사, 자치회 운영 및 법규 문답, 아파트 분쟁과 관련된 법정 판결 등 ‘아파트에 관한 모든 정보’가 실려 있다.“공무원이 아파트 자치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씨는 요즘 자신과 같은 공무원들이 아파트 주민 운동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공무원이 아파트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입주자 대표회의 간부를 공무원이 맡으면, 업자와 관리소장이 유착·결탁하고 있다는 종래의 인식이 바뀌고, 주민의 신뢰를 얻게 된다.” 한씨는 공무원이 아파트 자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공복으로서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한씨에 따르면 아파트는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교육장이다. 주민들이 모여 의견들을 제시하고, 토론을 거쳐 요구 사항을 확정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산 교육이라는 것이다.

“아파트를 재산 목록 1호로 여기면서도, 단지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 하겠지’ 하는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한씨가 아파트 자치 운동을 통해 바라는 세상은, 미풍 양속과 두레 정신을 복원해 아파트를 ‘사람 사는 마을’로 만드는 것이다.

한씨는 올해 말쯤 자신의 아파트 자치 운동 경험을 묶어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나는 집 한 채밖에 재산이 따로 없다. 그러나 퇴직금으로 충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별 걱정은 없다.” 퇴직금이면 노후는 충분하다는 안분(安分)의 마음으로 여력을 지역 사회를 위해 쏟겠다는 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