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향기 물씬` 수목원 나들이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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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수목원 나들이/호젓하게 즐기며 ‘비밀의 화원’ 신비 만끽
ㅅ형, 안녕하세요? 얼마 전 훈훈한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수목원을 다녀왔습니다. 형도 아시죠? 우거진 숲이 주는 충만함을…. 이따금 파리한 나뭇잎 끝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소리도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오랜만에 그 느낌을 만끽하려고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감동하고 왔습니다. 도대체 뭘 보았기에 이리 호들갑이냐고요?

흐린 공기와 때 묻은 건물들이 어른거리는 서울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고운식물원(충남 청양·www.kohwun.or.kr)이었습니다. 한 식물 전문가가 ‘지난해 문을 열었는데, 볼 만한 수목이 꽤 있다’고 추천해 찾아간 것이지요. 양지 바른 골짜기에 자리 잡은 식물원에 들어서자 있는 듯 없는 듯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식물원은 12만 평쯤 되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더군요. 둘러보려니 너무 넓어 겁부터 났습니다.
곳곳에 죽죽 늘어선 나무들은 숨죽인 채 서 있었습니다. 물기 머금은 봄이 다가오면 금방이라도 푸른 잎을 펑펑 터뜨릴 듯한 기세로 말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정대헌 대리에 따르면, 고운수목원에는 목본류 1천2백여 종과 초본류 2천여 종, 수입 식물류 1천8백여 종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처럼 많은 초목들이 미치기라도 하듯 한꺼번에 꽃과 이파리를 틔운다면 어떨까요.

그렇지만 하루 22km씩 북진한다는 봄이 아직 산 너머에 있는지, 오색찬란한 화원이 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 듯했습니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미 급한 복수초와 수선화 들은 벌써 노란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자욱이 피어난 매화도 고왔습니다. 비탈에 선 산수유의 노란 꽃 빛깔도 그랬고요. 가까이 다가가 산수유 꽃 하나하나를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 작가 김 훈씨가 산수유를 두고 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수목원에서 맛보는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눈 좋은 선험자(先驗子)들처럼 보고 느껴보는 것. 그러나 사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산수유가 노란 구름처럼 보이지요. ‘봄이 내뿜는 아지랑이’처럼만 보여도 그게 어딘가요. 이런 마음으로 산수유를 보고 있는데, 식물원 정대헌 대리가 말을 건넸습니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비슷한 꽃을 비슷한 시기에 피운다.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사뭇 다르다. 가지가 반질반질하면 생강나무고, 각질처럼 껍질이 일어나 있으면 산수유다.”

고운식물원은 관목원 암석원 무궁화원 붓꽃원 야생화원 조팝나무원 철쭉원 장미원 비비추원 튤립원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꽃을 골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제 눈길을 끈 것은 들판에 아무렇게나 돋아나 있는 수많은 야생화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처녀치마는 이미 ‘보랏빛 치맛자락’을 휘날리고 있었고, 얼레지는 수줍은지 분홍 꽃봉오리를 이파리 밑에 감추고 있었습니다. 미선나무 꽃은 소복한 어린아이처럼 처연해 보였고요. 할미꽃 몇 포기도 고요히 햇볕이 잘 드는 비탈에 서 있었습니다. 괭이눈·은방울 돌단풍·현호색·붓꽃·꿩의바람꽃·동의나물은 초록 이파리 사이로 부지런히 꽃대를 세우고 있었지요.

고운식물원의 또 하나 볼거리는 곳곳에 서 있는 조각상 수십 점이었습니다. 빈 가지로 서 있는 초목들과 특히 잘 어울리는 조각은 나부상(裸婦像)이었습니다. 매화나무 밑에 엎드려 있는 나부상과 산수유 ‘꽃구름’ 아래 삐딱하게 서 있는 나부상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듯한, 연못 속에 몸이 반쯤 잠긴 나부상도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수목원 끝에 위치한 튤립원에는 유난히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튤립이 많았습니다. 이미 꽃을 피운 튤립은 모양도 색깔도 가지가지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이곳에만 오면 자리를 뜰 줄 모른다고 합니다. 화려한 색에 반해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거지요. 청양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잔디광장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입니다. 비탈진 잔디밭에 누우면 한없이 아래로 굴러내릴 것 같았습니다. 한밤에 이곳에 앉아 있으면 사방에서 밀려오는 꽃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검푸른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져 내린다고 하네요.

잔디광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책로입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책로를 걷는데 좌우에 늘어선 연분홍 진달래와 반짝이는 개나리·영춘화가 눈 인사를 해왔습니다. 이제 곧 하얀 조팝나무가 꽃을 피우면 눈 속을 걷는 기분이겠죠. 산책로 중간에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는 산막도 보였습니다. 실내를 들여다보니 취사 시설도 되어 있고, 그런대로 푸근해 보였습니다.

산막을 지나자 정자가 나타났고, 그 위에 서자 사방이 훤히 보였습니다. 그곳에 서서 봄빛 속의 세상을 구석구석,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빈 가지 위에 내리는 고요한 햇빛, 그 빛은 생명을, 푸르름을 일깨우듯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며칠 뒤면 이곳의 수목들은 눈부신 봄을 빚어내겠지요. 그러나 그 봄은 한순간입니다. 사진가 강운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봄)은 언제나 짧고, 그 뒤는 언제나 적막하다.’ 사람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도 그 짧음 때문이 아닐까요.

돌아오며 생각하니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은 울렁거리는 감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새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도 펴졌고, 꽉 다물었던 입도 살짝 풀려 있었습니다. 형도 시간이 나면 수목이 우거진 곳에 가보시죠. 그리고 마음껏 계절의 묘미를 느껴 보세요. 저보다 형의 심미안이 더 좋으니 아마, 형은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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