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일 청와대 사회복지수석 "노사 개혁 멈추면 삶의 질도 없다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6.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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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임금 구조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는 봅니다. 그러나 고임금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시각은 옳지 않습니다. 문제는 임금 상승률 못지 않게 생산성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저효율 구조
박세일 청와대 사회복지수석비서관. 그는 이각범 정책기획수석, 구본영 경제수석과 함께 ‘청와대 개혁 3인방’으로 꼽힌다. 정책기획수석 당시 사법 개혁 구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는, 자리를 옮긴 뒤에도 ‘신노사 구상’ ‘복지 구상’ ‘교육개혁안’을 내놓으면서 쉴새없이 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만큼 그를 향한 비판과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공기업의 해고자 복직에 청와대가 개입한 데 불만을 품은 재계가 ‘ 박세일 흔들기’에 들어갔다는 관측도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이각범 수석의 ‘21세기 도시 구상’ 파문을 계기로 교수 출신 청와대 참모들의 순진함과 과잉 의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의 ‘신노사 구상’은, 노동관계법 개정을 앞두고 노사 갈등이 증폭되면서 호된 시련에 직면했다. 정가에서는 그가 개혁 과정에서 상처만 입고 물러나게 되리라는 성급한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7월5일 집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그는 특유의 낙관론과 개혁 대세론을 폈다.

어제 이각범 수석의 ‘21세기 도시 구상’ 보도 브리핑 사건이 불거졌습니다. 이번 일로 청와대내 교수 출신 개혁 그룹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리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촌극으로 끝난 일입니다. 보완할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정책을 입안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대통령께서도 일을 잘해 보려고 하다가 생긴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개혁 그룹이 과욕을 부리는 건 아닙니까? 집권 중후반기인 만큼 이제는 벌여놓은 일을 추스르고 다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만.

마무리할 부분은 마무리하고, 계속해야 할 일은 계속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합니다. 국가 발전 문제를 한 정권 단위로 파악하고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현실 정치 일정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개혁은 시대적·역사적 과업이기 때문에 정치 일정과 다소 다른 관점에서 추진돼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박수석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신노사 구상만 해도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지나친 낙관론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냉소적인 반응마저 나오고 있는데요.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노사 대개혁은 우리가 지녀온 옛날식 생각과의 싸움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한 의식이 지배하는 분야의 하나가 노사 관계라고 봅니다. 이 분야에 변화와 개혁이 없이는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도 어렵고, 근로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고비용 저효율 문제인데, 저는 저효율 구조의 주요 원인이 노사 간의 불화와 대립에 있다고 봅니다. 개발 독재 시대의 잔재로 남아 있는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신뢰와 협력의 관계로 바꾸는 것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7월2일 경제장관회의에서는 저효율보다는 고비용 구조에 더 주목하면서, 근로자의 고임금이 고비용의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임금의 절대 수준이 세계적으로 높은 편에 속하고 그동안 임금 인상률도 비교적 높았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임금은 경제성장의 목표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처럼 연 7~8%씩 지속적으로 고도 성장을 하면서 완전 고용에 가까운 2~3%의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는 국가에서는 임금 상승률이 낮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임금 구조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는 봅니다. 그러나 고임금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시각은 옳지 않습니다. 문제는 임금 상승률 못지 않게 생산성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저효율 구조를 극복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노·사·정((勞使政)이 다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재계는 박수석의 노사 대구상에 대해 처음부터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특히 공기업의 해고자 복직 과정에서 청와대가 노조 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었다고 해서 큰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약간의 오해랄까, 일부 언론의 오보가 있었습니다. 해고자 복직 문제는 단체 교섭 대상이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한 최종 판단은 회사의 최고 경영 책임자가 내려야 한다, 이 두 가지는 해고자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기본 원칙입니다. 한국통신의 경우는 경영진이 해고 근로자 복직이 노사 화합을 위해 경영상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부에 그런 희망을 강하게 밝혔습니다. 정부는 그것은 경영 책임자가 필요성 유무를 잘 판단해 결정할 문제라고 했을 뿐입니다. 회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청와대나 노동부가 그 방향으로 밀었다, 그런 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지요.

어쨌든 재계에서는 청와대가 노동자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재야 노동계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작업중지권 부여와 무노동 무임금 파기 등 노조측에 번번이 밀리게 됐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30대 그룹 노무 담당 임원이 긴급대책회의를 가진 것도 그런 위기감 때문이 아닌가요?

급박한 위험에 처했을 때 개별 근로자의 작업중지권은 법에 보장돼 있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문제는 개별 근로자가 아닌 노조측에 작업중지권을 줄 것이냐 여부입니다. 노동부는 작업중지권이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개별 기업이 노사 협상 과정에서 이면 계약을 통해 합의했습니다. 기업도 원칙에 안맞는 일이라면 노조가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스스로 원칙과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지요. 현장에서 자꾸만 모든 문제에 정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 시대가 아니라니요? 그럼 어떤 식으로 노사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동안 정부는 노사 관계에 사사건건 너무 많이 간섭했습니다. 지난 30,40 년간 이른바 개발 독재 시대를 통해 우리나라는 노사 관계보다는 노정 관계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노사 화합을 이루려면 하루빨리 자율과 자치의 노사 관계로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정에서 노사 관계로 전환하려니까, 기업이 부담과 불만을 느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부는 큰 틀 안에서 원칙만 만들고 노사가 자율적으로 문제를 풀도록 한다는 것이 신노사 구상의 핵심 기조입니다. 큰 틀 자체를 잘 만드는 작업이 바로 노동법 개정 노력이지요.

그렇지만 정부 입장도 부처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요. 최근 재경원은 재계가 요구해온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등을 빠른 시일 안에 도입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재경원의 이야기는 우리 기업이 직면한 문제를 단기에 개선하려면 외국에서 이미 정착된 제도를 도입할 필요도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 제기 차원입니다. 경제를 책임 맡고 있는 부처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또 어제 텔레비전 방송을 보니까 나부총리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쪽에 이 문제를 적극 검토해 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말씀하더군요. 재경원 입장도 노개위를 안 거치고 일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모든 이슈는 노개위에서 합리적으로 수렴되고 공개적으로 토론될 것입니다.
복수 노조 문제는 허용 쪽으로 사실상 가닥이 잡힌 것 같은데요. 민주노총측이 이미 노개위에 들어가 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도 직결된 사안 아닙니까?

복수노조 문제에 대해서는 노개위 차원에서 아직 본격 논의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7월 중순부터 노개위가 주최하는 공청회가 시작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과 복수 노조 허용은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여하튼 복수노조 문제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쪽으로 가야지요. 그러나 아직은 예단하기 이릅니다.

9월로 예정된 노동관계법 개정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재계와 노동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노동계와 재계의 요구를 어정쩡하게 절충하는 형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노개위 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사자인 노사 대표는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3분의 1은 전문가와 학자 그룹, 나머지 3분의 1은 공익 단체 대표들입니다. 노사가 그동안 불편을 느껴온 모든 문제를 내놓고 토론하게 되지만, 최종 결정 과정에서는 공익 단체 대표와 전문가 그룹의 의견이 크게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노사 어느 한편의 주장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거나, 주고받기식 절충은 있을 수 없습니다. 노개위가 지향하는 것은 21세기를 향한 제도 개혁입니다. 제도의 합리화와 선진화입니다. 이해 관계 절충이 아닙니다. 노사가 발상 전환을 하고 대안을 깊이 검토한다면, 양쪽이 다 승리하는 윈윈( Win-win) 게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릅니다. 지난해 정책수석으로 있을 때 추진했던 사법 개혁 구상도 법조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좌절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한 신문에서는 ‘미완의 성공’이라는 표현을 썼던데,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국민이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저가에 공급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법 개혁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성공했습니다. 법조인 수를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전관 예우 등 비민주적인 관행을 고치는 문제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법무부가 적극 나섰습니다. 이 두 문제에 대해 법조계가 보인 자기 개혁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물론 교육 제도와 사법시험 제도 개선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으니 미완임에 틀림없습니다.

박수석은 기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계가 박수석의 신노사 구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그런 선입견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기업이야말로 국가 발전에 중요한 기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기업은 경제 발전의 견인차지요. 국가 발전을 생각한다면 반(反)기업적인 사고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반기업적인 의식과 정서가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은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기업적인 이미지를 갖게 만드는 것은 제 관심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잇단 개혁 구상과 좌절을 놓고 ‘박수석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다, 급진적인 개혁파다’하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처음부터 주자학을 하려고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실학으로서의 법학, 실학으로서의 경제학에 관심이 있었어요. 특히 사회과학은 현실 사회 발전에 적극 기여해야 한다고 믿어 그런 방향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교수로 있을 때는 공부하는 사람이 현실 문제에 너무 관심이 많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청와대) 와서는 너무 이상적이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실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삶의 모습 아닙니까?

박수석은 ‘세계화 수석’으로 불리리만큼 세계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지나치게 국가간·개인간 경쟁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행되는 데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이도 많습니다.

사실 그런 비판과 문제 의식 때문에 ‘세계화’ 화두가 나간 다음 ‘삶의 질’이라는 화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계화에서 우려되는 현상 중 하나가 양극화 현상입니다. 앞으로도 세계화 흐름을 타는 부분과 타지 못하는 부분 간에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쟁력을 갖춘 분야는 규제 완화를 통해 더욱 경쟁력을 가지도록 지원하는 한편 경쟁에서 뒤떨어진 분야는 노사 개혁, 복지 구상, 교육 개혁으로 보완하면서 계층간·지역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를 위한 세계화냐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화와 삶의 질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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