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에 펼쳐지는 고수들의 ‘정글 게임’
  •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기자) ()
  • 승인 200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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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고수 총출동 ‘한국 리그’ 개막…4장으로 밀린 서봉수 ‘명예회복’ 주목
바둑은 고전적이다. 한국의 프로 바둑 역시 정글을 연상케 하는 냉혹한 승부 세계이면서, 한편으로는 단(段)과 선후배 같은 고전적 권위가 각별히 존중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시작된 ‘2004 한국 리그’가 이런 전통을 무참하게 깨트려버렸다. 기업들이 ‘실력’과 ‘가능성’으로 평가한 프로 세계의 랭킹은 프로 기사 본인들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바둑TV가 기획한 2004 한국 리그는 8개 기업 팀이 프로 야구처럼 바둑 팀을 만들어 단체로 대결하는 대회. 각 팀 선수는 주장·2장·3장·4장까지 4명이다. 8개 팀의 풀리그인 정규 리그가 있고 포스트 시즌이 있다.

지난 5월13일, 한국 리그 개막식 날의 화제는 단연 선수 선발식이었다. 무대 전면에는 32명의 선수와 8개 기업에서 나온 임원진들이 모여 있었고, 수많은 바둑계 인사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팀의 선수 선발이 시작되었다(선수 32명 중 16명은 지난해 상금 순,나머지 16명은 예선전 통과자).

먼저 제비를 뽑은 결과 피더하우스·신성건설·한게임·한국얀센·범양건영·보해·파크랜드·제일화재 순으로 정해졌다. 가장 중요한 주장 선발이 이 순서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피더하우스는 망설임 없이 이창호 9단을 지목했다. 이창호는 이 무렵 최철한 8단에게 5연패를 당하고 타이틀을 2개나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었지만, 신뢰도에서 10년 정상의 그를 따라갈 기사는 없었다.
두 번째로 나선 신성건설은 최철한을 지명했다. 장내 인사들은 ‘역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리그는 텔레비전 속기전인 만큼 최철한이 이창호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런 순서로 이세돌 9단(한게임), 조훈현 9단(한국얀센), 유창혁 9단(범양건영), 송태곤 7단(보해), 목진석 8단(파크랜드), 박영훈 5단(제일화재) 순으로 주장이 정해졌다. 여기까지 이변은 없었고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2장 선발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2장 선발은 주장 선발과 반대로 진행되어 제일화재부터 선수를 골랐다. 제일화재·파크랜드·보해는 각각 조한승 7단·안조영 8단·원성진 5단을 지목했는데, 이들은 1장으로도 손색없는 강자들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10명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다만 이들의 랭킹이 궁금했는데, 기업 팀들이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순위를 매겨놓은 것이다.

범양건영이 2장으로 윤준상 2단을 지명하면서 장내는 놀람과 탄성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놀라움 속에는 ‘윤준상이 누군가. 프로 생활 3년차인 열일곱 살 새내기가 아닌가. 성적을 좀 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2장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범양건영측의 생각은 달랐다. “윤 2단이 최근 최철한·송태곤 같은 강자들을 꺾은 일이 있다. 현재 최철한과 함께 다승 랭킹 공동 1위를 달리고 있다.”

한국얀센은 여성 최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를 선택했고, 그 다음 한게임과 신성건설이 강동윤 2단과 허영호 3단을 2장으로 지목하면서 장내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동윤은 불과 열다섯 살이다. 윤준상처럼 아직 내세울 만한 성적을 낸 일도 없다. 그런데 내로라 하는 선배들을 제치고 2장이라니!
허영호는 그래도 좀 낫다. 지난해 농심배에서 한국 대표가 된 일이 있고, 또 한국 리그의 예행 연습을 겸해서 치러진 지난해의 드림리그에서 4장으로 좋은 성적을 낸 일도 있다. 그렇더라도 허영호가 김승준 8단이나 김주호 4단, 양재호 9단이나 서봉수 9단 같은 실력자들보다 위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강동윤이라니!

허나 강동윤을 뽑은 한게임의 실무자들은 전부 바둑광이었다. 또 곁에서 조언해 준 프로 기사는 김성룡 8단이었다. 그들은 “강동윤은 강하다. 경험이 부족하지만 가능성은 누구보다 풍부하다”라고 자신하고 있었다(강동윤은 첫 대결에서 한국얀센의 루이나이웨이 9단을 꺾었고, 허영호는 피더하우스의 이희성 5단에게 패했다).

3장 선발도 맨 끝 번인 제일화재부터 시작했다. 제일화재는 김주호 4단(그는 지난해 20연승으로 2003년도 연승상을 수상했다)을 택했고, 파크랜드는 신인왕전 결승에서 안조영에게 1대2로 패한 이영구 3단을 지목했다. 지난해 상금 랭킹 10위 김승준 8단은 3장의 맨 끝에 가서야 겨우 뽑혔다. 팀마다 숨은 사정도 있을 것이고 자료 분석에서 착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점은 꽤 의외였다. 각 팀이 젊은 선수를 선호하고 노장을 기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김승준은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도 10대와 20대에게 크게 밀려버렸다.

4장은 다시 반대로 돌아와 피더하우스부터 시작했다. 피더하우스가 거의 무명에 가까운 유경민 4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아직 신예라는 것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동양증권배 우승자 양재호 9단이 그 다음 신성건설에 의해 뽑혔다. 그는 나중에 “나도 놀랐다”라며 4장으로 밀린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속으로 2장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봉수 9단은 어찌된 사연인가. 세계 대회 우승자이고 진로배 9연승의 신화에 빛나는 ‘야전 사령관’ 서봉수가 4장으로 밀린 것도 원통한데, 4장에서도 그때껏 호명되지 않았다. 지난해 농심배 한국 대표였던 홍민표 3단, 루이나이웨이 9단의 남편 장주주(江鑄久) 9단의 이름이 차례로 불릴 때마다, 속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서봉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나머지는 불과 4명. 한 사람은 마흔아홉 살인 이홍렬 8단으로 그는 신예들의 숲을 뚫고 예선을 통과했지만, 스스로도 32번째 선택을 각오하고 있었으니 논외다. 서봉수의 경쟁자는 그렇다면 백홍석 3단과 김환수 초단. 김 초단은 올해 프로가 된 초년병이고 백홍석은 젊은 기사들 가운데 중간쯤의 성적을 내고 있는 기사다. 이 대목에서 범양건영은 장고(?) 끝에 서봉수 9단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백홍석·김환수·이홍렬 순서로 선수 선발은 끝났다.

나중에 최철한 8단에게 물어보니 “김주호 4단은 실력자인데 3장으로 밀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고, 유창혁 9단은 “김승준 8단이나 양재호 9단이 실력에 비해 너무 뒷좌석을 받은 것 같다”라고 했다. 서봉수 9단은 4장이 어떻느냐고 물었더니 “주장은 어림없겠지만 4장은 그래도 충분히 해낼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뒤로 밀렸을까라는 질문에는 최근의 난조 때문이고, 속기에 약한 면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업들이 보는 눈은 냉정했고, 전문가 이상으로 정확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연말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특히 가까스로 4장에 합류한 서봉수 9단의 활약 여부는 현재 바둑계의 큰 관심거리다. 한국 리그는 매주 목~일 요일 저녁 7시 바둑TV에서 생방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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