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정부와 재벌, 밀실 협상 그만둬라"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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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2년간 우리 시장에는 플레이어가 둘뿐이었습니다. 바로 정부와 재벌입니다. 정부는 금융기관을 통해 재벌을 협박하면서도, 밀실에서는 재벌과 협상해 왔습니다.”
최근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사태를 계기로 재벌 개혁이 새삼 주요 경제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제 겨우 회복 단계에 접어든 국가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칠 만큼 현대 사태가 미친 후유증은 심각하다. 지난해 5월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을 맡은 뒤 재벌 문제와 관련된 현장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전방위 활약을 펼쳐온 김상조 교수를 만났다.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자협의회를 해체하고 구조조정위원회는 당분간 존속시키겠다는 등 자율 개혁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첫 느낌은 개혁안이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기구만 해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재벌의 실체가 유지되는 한 산하 계열사들을 관리할 기구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관리 기구들이 음성적·비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재벌 총수의 경영 책임을 묻기만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재벌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려면 먼저 대주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를 임명해야 합니다. 현대가 사외이사 수를 늘리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재벌이 추천하게 되면 결국 옥상옥만 만드는 셈이어서 실효성이 없습니다. 현대가 정말 지배 구조를 개선할 의지를 보이려 한다면, 소액주주들을 위한 집중투표제부터 도입해야 합니다.

정몽헌 회장의 발표가 나오게 된 배경도 최근 ‘왕자의 난’에 비유된 경영권 쟁탈전 때문이었는데,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마디로 재벌이 자기를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재벌을 몰아세우거나 협박해 가며 조금씩 개혁하려고 노력한 한계가 드러난 것이죠. 지난 2년간 정부가 진행해 온 개혁의 핵심 과제가 잘못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의미의 재벌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벌 그룹들은 늘 개혁은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 정부는 법이나 제도를 통해 시장 경제 환경만 조성해 달라고 요구하는데요.

시장이 저절로 개선됩니까? 우리 시장을 이렇게 왜곡되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재벌이고, 왜곡의 핵심은 재벌의 지배 구조에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이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시장이 저절로 개선될 수 없다면 누군가 이를 고쳐야 하는데, 저는 1차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봅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재벌 지배 구조를 개선할 제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외국 경제 전문가나 국내 학자들도 신자유주의 이론을 앞세워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경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정부에도 잘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2년간 우리 시장에는 플레이어가 둘뿐이었습니다. 바로 정부와 재벌입니다. 정부는 금융기관을 통해 재벌을 협박하면서도, 밀실에서는 재벌과 협상해 왔습니다. 정부가 눈에 띄는 성과를 빨리 내려는 ‘조급증’을 버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개혁해야 할 대상과 계속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근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마감되었습니다. 올해 재벌들의 자세가 좀 달라진 점이 있던가요?

주총을 차례로 거치면서 소액주주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새삼 절감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중공업이죠. 지난해 어깨들을 동원해 참여연대 대표들의 발언을 막고 주총을 강제 진행했던 현대중공업이 올해는 ‘모든 발언을 보장한다’며 발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덕분에 주총이 11시간이나 걸렸지요. 경영자들의 인식이 조금 바뀐 점은 성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발언만 자유롭게 허용했을 뿐 ‘소액주주들이 추천하는 사외이사를 임명하라’ ‘부실 감사한 회계법인을 바꾸라’ 등 주주들이 제안한 안건은 모두 부결되었습니다. 이야기만 듣겠다는 것이지, 이를 반영할 자세는 아예 없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11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인내를 갖고 듣던 현대 임원들이 딱 한 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지배 구조와 관련해 정주영 명예회장 이름을 거론한 질문이 나왔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정명예회장 이름을 거론한 질문도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임원들은 정명예회장이 계셔서 현대가 발전했고 한국 경제가 발전했는데 어떻게 그런 분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하느냐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결국 기업인들이 누구를 보고 경영을 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죠. 재벌 총수의 황제적 경영이 여전하다는 생각입니다.

참여연대는 올해 주총에서 데이콤과 성공적인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LG그룹이 관계사들을 통해 데이콤 주식을 위장 분산했다고 집중 공격했는데, 이번 성과로 과거의 잘못을 묻어둘 계획입니까?

LG측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서 당연히 고민 많이 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앞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우선 데이콤은 사실상 공기업처럼 운영되면서 아무도 경영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무이사 한 사람이 회사 자금을 2백억원 넘게 유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지요. 데이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 구조를 개선해야 할 기업입니다. 다음으로 LG가 지분을 50% 넘게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인 대주주가 된 상황에서 LG의 데이콤 인수를 반대하는 데 힘을 쏟는 일이 비생산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번 주총을 통해 데이콤은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액주주들이 추천한 사외이사를 2명 임명하고, 이들이 감사위원회를 구성해 회사의 주요 결정 사항을 사전 승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장 모범적인 성과를 냈습니다. 앞으로 이런 사례가 재벌 기업 전체로 확대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정부의 개혁 노선이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재벌의 반격을 받아 큰 고비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재벌을 개혁하려면 법과 제도를 손질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만드는 곳이 국회니까 집권 여당이 패하면 개혁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개혁을 정치인이나 재벌에게 맡길 수만은 없습니다. 시민단체가 국민의 지지를 업고 정부나 정치권을 견인해 가면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재벌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통해 분출된 놀라운 에너지가 앞으로도 국민의 지지를 얻어 지속된다면, 개혁 에너지를 계속 살려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참여연대는 총선 이후에 언론 개혁과 재벌 개혁 두 가지 방향으로 개혁 에너지를 집중할 생각입니다.

재벌 개혁에 가장 필요한 법과 제도가 무엇입니까?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입니다. 재벌 지배 구조를 가장 잘 개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소액주주·채권단·종업원 등 이해 당사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업 경영을 사전에 감시하고 사후에 제재할 제도적 권한을 주면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전 감시에 필요한 제도가 바로 집중투표제입니다.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대변할 사외이사를 선출하려면 집중투표제를 지금처럼 기업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 사항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또 사후 제재를 위해서 집단소송제가 조속히 도입되어야 합니다. 집단소송제는 효과가 강력한 만큼, 재벌의 저항 역시 거셉니다.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변변한 심의조차 받지 못하고 폐기된 이 제도를 되살려낼 수 있는지 여부가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와 능력을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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