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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시사저널>추천 ‘여름나기 도서’ 19권

<시사저널>이 권하는 ‘여름에 읽을 도서’ 19권

李文宰 기자 ㅣ | 승인 1997.07.10(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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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개인으로 돌아가는 길

강릉에 사는 한 젊은 시인은 책을 보고 싶을 때마다 7번 국도를 달려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앉는다. 서울에 사는 한 문학 평론가는 2~3일 호텔 방에 들어가 독서에 몰두한다. 두 문인의 책 읽는 모습은 얼핏 호사처럼 보이지만, 기실 책 읽기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중노동’이다. 배타적인 시공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독서는 불가능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라지기만 하는 속도주의에 지배당하는 일상에서 현대인이 개인으로 돌아가는 길은 대부분 차단되어 있다. 책 읽기만이 거의 유일하게 능동적 개인으로 돌아가게 한다(영화는 화면 앞의 관객들에게 얼마나 독재적인가. 독자에 견주어 관객은 수동적이다).

모든 독자가 바닷가의 시인이나 호텔 방의 평론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두 문인과 같은 아름다운 책 읽기에 대한 꿈을 저버릴 까닭 또한 없다.

휴가철. 그곳이 대자연이든, 도심의 한복판이든 저마다 개인으로 돌아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시사저널>은 작가 성석제의 소설에서 <람세스>에 이르기까지 주로 문학 작품들을 뽑아 독자들에게 권한다. 올 상반기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품들을 뽑았다. 기행문과 인문 분야는 비소설 분야에 포함했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은 비평가나 언론,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검증’ 받은 책들이다. <편집자>
분단 상처에서 사랑의 기쁨까지

한국 소설/<불의 제전> <달의 강> 등

독서 목록. 80년대만 해도, 휴가나 방학의 문턱에서는 독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선배들이 물려주던 그 목록은 인문사회과학 서적 위주였지만 대하 소설도 반드시 끼여 있었다. 대하 소설은 개인과 전체, 인간과 역사 사이에서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삶과 사건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시력과 시야를 한 단계 끌어올리게끔 한다. 대하 소설 읽기는 언제나‘성년식’이다(대하 소설의 마지막 권을 읽고 났을 때의 뿌듯함이라니).

중견 작가 김원일씨의 <불의 제전>(전 7권·문학과지성사)은 전후 세대, 특히 신세대 독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작품은, 우리들의 구체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엄연한 현실이면서도, 탈역사·탈국가 같은 문화적 담론에 가려 있는 해방 공간 및 분단 상황의 고통스런 발원지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겪은 작가에게 그 전쟁은 아물지 않는 상처였고, 언제나 되돌아가는 문학적 출발점이다. 80년에 집필을 시작해 95년에 완성하기까지 집필 기간만 18년이 걸렸다.

김원일 문학의 절정인 동시에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한 성취인 이 대하 소설은 6·25가 일어나던 해 1월부터 그해 10월까지 경남 진영과 서울을 오가며 전개된다. 소설 속의 시공간은 다른 대하 소설에 견주어 작아 보이지만, 좌우익 투쟁과 토지 개혁 과정을 둘러싼 혼란, 인공 치하와 수복, 그 와중에서 부침을 거듭하는 민중의 가혹한 삶이 생생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지면서 현대사의 거대한 벽화를 재현한다. 특히 인공 치하의 서울을 묘사한 대목이 백미이다.

<불의 제전>이 분단의 ‘원년’을 그린 남성적 벽화라면, 김채원씨가 최근에 펴낸 <달의 강>(해냄)은 분단 2세대 여성들의 수채화이다. 수채화이기 때문에 유화와 같은 리얼리즘 언어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달의 강>은 일본에 사는 북한인 여성과, 납북된 아버지의 딸로 서울에서 성장한 도쿄 유학생인 성혜라는 인물을 통해 남북한, 즉 분단 문제를 의인화한다.

도쿄와 파리, 20년 전과 현재, 그리고 ‘쌍둥이 롯데’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달을 이고 달리는 자전거’이다. 소설의 화자인 성혜는 베를린 장벽 붕괴 7주년 관련 신문 기사를 읽다가 옛 친구였던 재일 북한인 여성과, 스승의 부인이 연루된 동베를린 사건을 떠올린다. 작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종로 거리의 데모 행렬을 가로지르며 달려나가는 자전거를 묘사한다. 두 바퀴지만 한 곳을 향해 달리는 자전거에는 남북의 두 여자 친구가 타고 있고, 그 위에 여성성의 신화적 상징인 달이 떠 있다. 여성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분단 문학. 김채원씨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문학적 화두는 이제 분단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 고대사와 고구려, 그리고 선(禪)불교의 법맥을 탐사하고 돌아온 최인호씨가 지난 봄에 펴낸 <사랑의 기쁨>(상하 권·여백)은 ‘정직한’제목이 환기하는 바 그대로,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와 20대 딸은 서로 지독한 불화의 관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딸은 어머니가 평생 사랑했던 한 남자를 찾아가는데,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사랑의 의미, 즉 단순하고, 또 그래서 진실하며, 늘 새로운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성숙의 과정이기도 하다.

문학상 수상작품집, 최근 소설의 흐름 일별하는 데 도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휘청거리는 이때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주목한 이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은 그 서사성에 있다. 최근 신세대 소설이 이야기의 힘을 잃어버리고 폐쇄적 자아 속으로 침잠하거나, 영화와 재즈로 대표되는 대중 문화적 기호에 기우는 현상에 식상한 독자라면 <사랑의 기쁨>에서 소설 읽기의 기쁨을 새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소설은 다름 아닌 이야기’라는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새롭고, 동시에 정확한 한국 소설 문학의 지형도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는 언제 오는가>(제28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조선일보사)와 <은비령>(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현대문학)을 권한다. 앞의 작품집에는,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를 모티브로 삼아 죽음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신경숙씨의 수상작 <그는 언제 오는가>를 비롯해 고종석 김영하 김형경 김형수 성석제 윤영수 은희경 이윤기 씨 등의 후보작도 함께 실렸다. 신경숙씨의 <그는 언제 오는가>와 더불어 로드 로망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이순원씨의 수상작 <은비령>을 표제작으로 올린 뒤의 작품집에는, 공선옥 김병언 김인숙 서하진 이윤기 전경린 씨 등의 후보작이 함께 실렸다.

수상 작품집은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성취를 한눈에 파악하는 한편,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 세계와 언어를 한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설이 갈수록 장편화하고 있는 추세에서, 모국어에 대한 작가들의 헌신, 단단한 구성, 동시대적인 주제 의식 등 중·단편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도 향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중견 소설가와 평론가들의 심사평을 읽으며 최근 소설의 흐름을 일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그만큼 결함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독서 취향에 맞는 작가를 선택해(독자들에게는 작가를 편애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그 작가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그 작가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독자의 책 읽기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매년 문학상 수상집 한 권만 읽으면 된다’는 일부 ‘안이한 독자’들을 양산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이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강)는 지난 4월 하순, 서른네 살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소설가 김소진씨의 유고집이다. 고인의 작품 세계는 ‘아버지와의 대결’로 압축된다. 김소진 문학은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아버지에서 출발했는데, 그 아버지를 극복하기 직전에 정지하고 말았다.

표지에 환한 미소를 터뜨리고 있는 작가의 초상이 박혀 있어서 유고집 분위기가 한층 두드러지는 이번 책에는, 중편 두 편과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고 있지 않았던 미완성 단편을 포함해 모두 열한 편이 실려 있다.

그의 소설은 이제 한국 문학의 미래를 위한 ‘거름’의 자리로 돌아갔다. 일찍이 리얼리즘 정신과 모국어에 대한 열정으로 투철했던 그는, 벌써부터 90년대 대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미지의 라캣별과 고대 이집트로의 여행

외국 소설/<람세스> <희망의 괴물들> 등

올상반기에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번역 소설은 단연 <람세스>(전 5권·문학동네)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수십만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고대 이집트 문명전>은, 달아오르던 람세스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이집트 문명전도 소설 <람세스>의 영향을 받았을 터이다).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소설 <람세스>는 이제 독서계를 벗어나 이른바 아버지 증후군과 박정희 증후군, 그리고 대선 정국 등과 맞물리면서 사회적 분석 대상의 하나로 떠올랐다( <시사저널> 제 400호 문화면 참조).

<람세스>(김정란 번역)의 1차적인 매력은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상상력과 이집트 문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탄력적인 문장에서 비롯한다. 이 소설은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갈등, 질투와 사랑, 신화와 모험 등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독자들을 순식간에 기원전 13세기 고대 이집트로 이끌고 간다.

모든 소설은 현재와의 대화이다. 모든 소설의 독자는 당대의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3세기, 고대 이집트의 황금기를 건설한 신의 아들 람세스는 강력한 권위(권위주의가 아닌)를 가진 아버지가 없는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아버지로 군림하고 있다. 영웅주의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의해 ‘공상과학 소설’로 번역되면서 주변 문학으로 폄하되어 왔던 과학소설(SF)이 마침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 소설의 가능성은 매우 밝다. 최근에 선보인 메리 도리아 러셀의 <영혼의 빛>(전 2권·형선호 옮김·황금가지 펴냄)은, 스물여섯 권으로 기획된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도 과학 소설의 범주에 든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고고인류학자로도 활약하고 있는 미국 여성 작가 러셀은 이 소설에서 젊고 이지적인 예수회 신부와 함께 21세기 우주로 떠난다.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이끌려 낯선 외계로 떠나는 8명의 탐사대. 그들은 라캣 행성에 도착해 새로운 종족과 만나게 된다. 인류학과 고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의문을 탐색하는 이 소설은, 현재의 학문과 가치관을 끊임없이 반성케 하는 지적 소설이지만 유머와 재치를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 중국 현대문학으로 들어가는 문

최근에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이 선 영국 작가 니콜러스 모즐리의 <희망의 괴물들>(전 3권·김석희 옮김·한겨레 펴냄)은 독자들을 태우고 20세기 전반부로 여행한다. 하지만 매우 지적이고도 새로운 형식의 답사 여행이다. 이 소설에는 독일의 여성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오스트리아의 분석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 등 20세기 전반에 등장해 20세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희망의 괴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영국의 최상류 집안 출신인 작가 니콜러스가 열아홉 번째로 발표한 이 소설은 90년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휫브레드 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내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20세기의 인물들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근친상간, 대숙청 시대의 소련, 미국의 원자탄 제조 계획 등 20세기를 관통한 정치적 격변과 광기를 배경으로 철학과 과학을 강조한 이 소설은, 작가가 카오스 이론의 관점에서 정돈한 20세기 지성사이다.

사실 거의 모든 번역물은 번역되기 이전에 그 언어권에서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문제작들이다. 베스트 셀러가 아니면 무슨 상을 받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 성가들이 문화적 차이를 쉽게 메워 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 여성 작가 휘트니 오토의 <아메리칸 퀼트>(홍현숙 옮김·김영사 펴냄)는, ‘미국식 조각보 깁기’(퀼트)가 한국의 조각보 문화와 얼마만한 접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91년 미국 <뉴욕 타임스>가 ‘올해의 베스트 셀러’1위로 선정한 이 소설은 미국의 평범한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아홉 여성의 삶이 저마다 조각보를 이룬다. 이때 조각보는 각 여성의 삶을 은유한다. 기다림 좌절 불안 고통 등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 앞에서 버려지는 여성들의 개인사를 비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삶의 조각을 한 곳에 모으라’. 삶은 세월과 더불어 용서와 용기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90년대 초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으로도 번역되었다) 이후 꾸준히 한국 독자를 확보하면서, 왕가위 영화와 더불어 하나의 문화적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현대 일본 문학의 한 경향을 대표하고 있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표현대로 ‘심플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수처럼 무색무취하다. 식물성이다. 남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대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댄디’들. 하지만 그 댄디즘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70년대 일본 전공투 세대들의 세대론적 상처의 변용이었다.

<1973년의 핀볼>(김난주 옮김)은 열림원이 시리즈로 펴내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선의 세 번째 책으로, 작가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속편에 해당한다. 전자오락 이전의 게임기인 핀볼 머신은 한 세계(혹은 존재)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데, 이 무위(無爲)의 게임은 그의 소설들이 밖(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하루키 소설에 대한 첫인상은 문체의 가벼움이지만, 그 가벼움에는 여러 겹의 이미지들이 덧씌워져 그 이미지들을 해독하는 것에 따라 독후감의 부피가 달라진다.

<살아간다는 것>(여화 지음·백원담 옮김·푸른숲 펴냄)은 중국 현대 소설이다. 올해 37세인 중국 작가 여화는 중국 평단으로부터 ‘20세기를 총괄하고 21세기로 넘어서려는 세기말 의식이 체현된 작가’‘중국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 혁명과 대약진 운동, 그리고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파란의 역사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스려져 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한 늙은 농부를 통해 작가는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근원적이고도 보편적인 믿음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장예모 감독이 94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 <인생>의 원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새로운 독서의 대륙, 중국 현대 문학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을 성찰케 하는 소중한 삶의 이야기

비소설/류시화·장일순 등의 산문집

대형 서점의 분류법에 따르면 문학은 시와 국내외 소설, 그리고 비소설로 나뉜다. 그러나 시와 소설이 아닌 문학 작품을 막상 비소설로 묶다 보면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비소설과 인문 사회과학 서적의 경계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원인은 산문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서이다. 만일 산문의 시대라면 비소설은 당연히 산문으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한국 산문의 현주소, 즉 소설이나 시, 비평 등 ‘주류 장르’에 희생당하고 있는 현실은 기행문 분야를 들여다보면 이내 드러난다. 특히 해외 여행기. 한 권의 기행문이라면 그것은 관광객의 감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시인이자 번역가인 류시화씨의 인도 여행기인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열림원)을 제외하면, 기행문은 그리 많지 않다.

기행문은 현지 문화를 직접 체험하지 않는 한, 단순한 풍물 스케치에 머무르고 만다. 두 권의 베스트 셀러 시집을 펴낸 시인 류시화씨는 지난 10년간 열 차례에 걸쳐 인도와 히말라야 등지를 여행했는데, 다섯 번째 여행에서야 그곳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하늘 호수…>는, 그러니까 다섯 번째 여행 이후부터 쓰여진 셈이다. 연신 ‘노 플라브럼’을 외치는 가난한 삼륜 택시 운전수, 차비를 빌려 달라고 떼쓰는 성자, 누더기 담요를 두른 요기 등 인도의 길 위에서 겪은 체험에서 지은이는 삶과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길어올린다.
세기말 증후군의 실체 읽을 수 있는 <서기 1000년과…>

동화 작가 권정생씨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 이어 녹색평론사가 펴낸 <나락 한알 속의 우주>는 94년 타계한 고 장일순씨의 이야기 모음이다. 일찍이 70년대 후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바탕을 둔 생명운동으로 전환시킨 ‘생명운동의 스승’ 장일순씨는 군사 독재에 저항한 시인에서 80년대 이후 생명론을 중심으로 한 사상가로 변모한 김지하 시인의 스승이기도 하다.

불교와 기독교와 동학 사상에서 생명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한 지은이는 나락 한알, 머리털 하나, 풀벌레 한 마리 등 모든 생명에는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일러준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공경을 받고 또 공경해 주는 공생 관계라는 것이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한 핵심이다. 이 책은 생전에 고인이 생명 운동에 관해 쓴 글과 대담, 그리고 강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너무 떠들어대서 오히려 불감증을 낳고 있는 환경 혹은 문화 운동의 오류를 근원에서부터 따끔하게 지적하는 소중한 글들이다.

프랑스 사회는 글 쓰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신문기자는 물론 학자·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문학적 언어를 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다. 9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대표적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르주 뒤비도 아름다운 문장에 신경을 많이 썼던 학자였다.

그러나 최근 번역된 조르주 뒤비의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양영란 옮김·동문선 펴냄)은 안타깝게도 지은이의 문장력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방송·인쇄 매체와 나눈 대담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역사 서술의 목표를 미래에 대한 확신과 현실적 고통을 해결하는 데 두고 있는 지은이는, 서기 1000년 무렵의 사람들이 느꼈던 고통과, 서기 2000년을 앞두고 있는 오늘날의 두려움을 비교 분석하면서, 현대인들로 하여금 공포를 해소하게끔 한다.

이 책은 천 년을 사이에 둔 두 시대 인간들이 느꼈던 공포를 궁핍·타인·전염병· 폭력·사후 세계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논의를 시작한다. 예컨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8~10세기 중세인보다 20세기 현대인들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원색 도판과 사진을 곁들여 이해를 돕고 있는 이 책은 세기말 증후군의 거품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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